이승희 기자 | 176호 | 2009-07-15 | 조회수 3,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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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기업들, 간판교체 무더기로 중단·보류 가이드라인 등 규제가 주요인… 법 개정도 한몫
예년같으면 인부들로 인산인해를 이루며 분주하게 돌아갔을 간판제작공장. CI 선포식에 맞춰 전국 곳곳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이뤄지던 대기업의 간판설치 현장 모습들. 하지만 올해는 이같은 현장이 좀처럼 눈에 띄지 않는다. 매년 상반기면 쏟아져 나오던 기업간판 물량이 ‘올스톱’ 되고, 그래서 간판 제작공장의 분위기는 한가롭다 못해 적막하기까지 하다.
▲상반기 대기업 간판교체 ‘단 한 건’ 지난해부터 하향곡선을 그려오던 대기업의 간판교체 물량이 올 들어서는 아예 바닥에 곤두박질을 쳤다. 그동안 대기업을 위주로 간판을 제작·시공해 왔던 소위 메이저급 제작업체들 사이에는 요즘 불안감을 넘어 존폐의 위기감이 감돌고 있다. 기업의 CI 교체는 올스톱 상태, 유지보수도 거의 ‘잠정중단’ 상태이다. 업계가 피부로 느끼는 체감경기는 전년 대비 절반 이상으로 뚝 떨어졌다. 상반기에 예년 평균매출의 절반은커녕 10%도 거두지 못했다는 자조가 나올 정도로 간판업계의 사업환경은 심각한 상태에 이르고 있다.
한 정유업체의 협력사로 등재돼 있는 모 제작사는 매년 이맘때면 해당 정유업체에서 나오는 일만으로도 10억 정도 매출을 올렸는데, 올해는 겨우 4,000만원의 매출이 발생했다고 한다. 굴지의 금융기관과 전자업체 등 다수의 대기업에 협력사로 등재돼 부러움을 사온 한 제작업체 관계자는 “매출을 입에 올릴 수조차 없다. 거의 100% 줄었다고 보면 된다”며 “지난해 동기 대비 2~3% 수준”이라고 푸념했다. 간판업계 불황 한파의 전운은 이미 지난해부터 본격화됐다. 30년 연륜의 베테랑 제작업체 S사와 기업간판쪽으로 유명세를 탔던 J사 등 누구나 알만한 업체들의 부도소식이 이어졌고, 그 상황에서도 업계의 단가경쟁은 갈수록 도를 더해 간판관련 입찰가는 끝간데 없이 곤두박질쳤다. 이같은 혼돈의 상황에서 최근에는 물량마저 뚝 끊겨버려 마침내 제작업계가 고사를 면하기 힘든 절체절명의 위기에 봉착한 것이다.
▲불경기와 규제가 핵심 걸림돌 업계에 고사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지고 있는 이유로 흔히 지적되는 것은 ‘경기 침체’이다. 끝모를 침체로 많은 기업들이 당초 CI 교체나 매장을 리뉴얼하려던 계획을 아예 중단시키거나 혹은 지연시키고 있다는 게 업계의 공통된 전언이다. 예년같으면 수 십 건에 이르는 대규모 간판교체 물량이 나올 시점이지만, 올 초부터 6월 사이에 진행된 대규모 교체건은 이동통신업체 L사 한 군데 뿐이었다. 하지만 불경기보다도 더 간판업계를 어렵게 만들고 있는 근본 요인은 바로 정부의 급진적인 규제라는 지적과 분석이 더욱 설득력을 가지고 있다. 자고 나면 룰이 달라지는 상황에서 기업들이 적지않은 예산을 들여 간판을 교체할 리가 만무하기 때문이다.
한 제작업체 관계자는 “새로 가이드라인이 만들어지고, 또 어떤 지역을 지정 고시해 규제를 가할지 모르는 상황에서 어느 누가 쉽게 간판 교체를 시도할 수 있겠느냐”면서 “지자체의 조례가 바뀌거나 가이드라인이 제정돼 특정구역 고시가 발효되면, 거기에 맞춰 사이즈 등을 수정 보완해야 하기 때문에 간판 교체는 장기간 지연되고 중단될 수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게다가 현재 광고물과 관련된 모법인 옥외광고물등관리법의 개정을 앞둔 시점이어서 간판시장은 더욱 차갑게 얼어붙고 있다. 기업들은 불경기인데다 법령의 변화가 예고되고 있는 시점에서 무리하게 간판 교체를 진행할 필요가 없다는 입장이다. 이런 가운데 얼마전 행정안전부가 내놓은 개정안이 미흡하다는 이유로 재개정론마저 거론되고 있어 대기업들은 이래저래 간판교체 시도의 발목을 붙들리고 있다.
▲타사업 전환… 간판업 포기도 상황이 이렇게 되자 간판 제작업체들은 다른 사업쪽으로 눈을 돌리거나 아예 간판업을 접겠다고 포기선언을 하기도 한다. 일부 제작업체들은 지자체들이 전국 곳곳에서 실시하는 간판정비사업의 수주경쟁에 주력하기도 한다. 그동안 대기업 간판일을 통해 축적해온 입찰 노하우와 프리젠테이션, 디자인능력 등을 십분 활용해 사업권을 따내 보려고 안간힘을 다하고 있다. 하지만 이같은 시도도 그동안 제작시스템이나 디자인능력을 충실히 갖춰놓은 극소수 제작업체들이나 넘볼 수 있는 일이다. 그렇지 못한 업체들은 공개경쟁의 피튀기는 최저가입찰 참여를 엄두조차 내지 못한다. 만약 조금 무리해서 욕심을 냈다가는 손해는 물론이고 존속 자체를 보장받지 못한다.
한 제작업체 관계자는 “지자체에서 사업자를 공모하면 전국에서 많은 업체들이 몰려든다. 간판업종 뿐 아니라 지자체가 조건으로 제시한 산업디자인, 금속창호 등의 자격을 갖춘 업체들이 벌떼처럼 몰려든다”면서 “응모 자격요건을 갖추기 위해 투자하고, 2~3달 동안 인력과 시간을 들여 디자인하고, 프리젠테이션을 준비하지만 경쟁에서 떨어지면 투자 비용은 고스란히 손해로 돌아온다”고 말했다. 또 다른 제작업체 관계자는 “간판 경기가 바닥을 치면서 부익부, 빈익빈이 더욱 뚜렷해지고 있는 것같다”며 “자본력이 뒷받침되고 뭐든 갖추고 있는 회사는 독점적으로 사업을 수주해 가고, 그렇지 못한 회사들은 대기업 간판에서든, 정비사업에서든 어떤 영역에서도 계속 도태돼 결국 도산할 수밖에 없다”고 전망했다.
하지만 경기가 저점을 찍고 회복세로 돌아서고 있다는 조심스러운 낙관론이 고개를 들고 있기도 하다. 또한 KT와 KTF가 합병되면서 CI 통합작업이 시작되고, 화장품 프랜차이즈 F사, 제과 프랜차이즈 P사 등 소위 요즘 잘나간다는 프랜차이즈 업종에서 대대적인 매장 리뉴얼을 추진중이라는 가뭄의 단비같은 소식들이 전해지고 있다. 한 업계 관계자는 “하지만 여전히 모법 개정이 차일피일 미뤄지고 있고, 수도권에서 시작된 규제가 지방으로까지 확산되고 있어 상황은 갈수록 악화되는 모습”이라며 “지자체들이 고시를 통해 각종 규제를 남발하는 현상을 제어할 수 있는 방향으로 법 개정이 조속히 이뤄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또 “정부의 규제에 따라 간판의 트렌드가 크게 달라지고 있는 시점에서 업계도 구태를 빨리 벗어야 할 때”라며 “자본력이 있는 회사는 투자를 통해 디자인능력과 시스템 환경을 업그레이드해야 하며, 그렇지 못한 경우 컨소시엄을 구성해서라도 대외적인 경쟁력을 제고해야 한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