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한중 기자 | 203호 | 2010-08-25 | 조회수 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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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의 만화주인공들, 조형물과 디지털미디어로 재탄생
‘무인도에서 지옥훈련을 마친 공포의 외인구단과의 한판 승부!’ 9회말 2아웃 1스트라이크 1볼. 타석에 들어선 까치 ‘오혜성’이 매서운 눈매로 마운드를 응시하고 있다. 이때 감독이 타임을 요청하고 구원투수를 올려 보낸다. 구원투수는 바로 ‘당신’이다. 귓가에는 관중들의 함성과 섞인 야구캐스터의 흥분한 목소리가 요란하게 들려온다.
만화 속 장면이 아니다. 이것은 경기도 부천시 상동에 위치한 ‘뮤지엄 만화규장각’에서 펼쳐지는 현실이다. 드디어 당신이 야구공을 손에 쥐었다. ‘오혜성’과 당신의 피할 수 없는 맞대결. 과연 당신의 공은 그의 배트를 비해 미트 속으로 파고 들 수 있을까? ‘뮤지엄 만화규장각’은 한국만화영상진흥원이 운영하는 만화문화공간으로 한국만화의 100년 역사가 고스란히 간직된 곳이다. 지하 1층, 지상 4층으로 구성돼 있으며 총 8,580㎡에 이르는 규모를 자랑한다. 이 중 3층과 4층의 전시공간 ‘만화박물관’은 상설전시공간과 체험전시공간, 기획전시공간 등으로 이뤄져 다양한 볼거리 및 체험시설을 갖추고 있다. 특히 각종 조형물과 디지털미디어로 재탄생한 추억 속 만화 주인공들을 만나볼 수 있는 재미가 쏠쏠하다.
그러나 만화를 전시하고 있다고 가볍게만 여겨서는 곤란하다. 이 공간에서는 한국 만화의 역사와 전시에 맞추어 그 시절의 시대상과 분위기, 아픔까지도 느껴 볼 수 있다. 자, 그럼 지금부터 한국 만화 100년史를 품고 있는 뮤지엄 만화규장각으로 떠나보자.
뮤지엄 만화규장각의 입구 앞에는 손의정 선생이 그린 ‘동경4번지’의 주인공 혁형사가 기둥 뒤에 숨어 총을 겨누고 있다.
고우영 화백의 작품 중 하나인 ‘수호지’의 한 장면이 조형물로 제작됐다. 15세 때부터 숨을 거둔 67세까지 한 번도 펜을 놓지 않았던 故 고우영 화백. ‘풍자’와 ‘해학’은 결코 그와 떼어 놓고 생각할 수 없다. 그는 마치 ‘숨은그림찾기’를 하듯 자신의 작품 속에 ‘비딱함’을 숨겨 놓았다.
만화박물관 입구에 설치된 LED디스플레이에서는 각종 만화 캐릭터들이 등장해 관람객을 안내한다.
‘공포의 외인구단’(이현세 작)은 지난 1980년대 “난 네가 좋아하는 일이라면 뭐든지 할 수 있어!”라는 명대사로 청소년을 물론 성인들까지 만화의 세계로 빨아들였다. 디지털미디어로 재탄생한 이 만화 속 주인공 오혜성이 당신의 공은 기다리고 있다.
곳곳에서 만나는 추억의 만화 속 주인공들
뮤지엄 만화규장각 내부 만화박물관의 모습. 거대한 조형물로 제작된 추억의 만화 잡지와 단행본들이 공간을 장식하고 있다
1970년대의 모습을 그대로 재현해 놓은 만화방의 모습. 만화책 한 권을 빌려보는데 10원이었다는 그 때, 용돈만 생기면 만화방으로 달려갔을 빡빡머리 소년과 단발머리 소녀들의 모습을 상상해 보게 된다.
만화방 속에 설치돼 있는 1970년대의 미원 POP가 인상적이다.
인터랙티브 디스플레이를 통해 만화 캐릭터를 직접 만들어 볼 수도 있다.
‘동경4번지’의 주인공 혁형사가 기둥 뒤에 숨어 당신을 겨냥한다. 그를 피해 건물 뒤편으로 돌아가면 오늘도 엄마를 찾아 헤매는 ‘엄마 찾아 삼만리’의 금준이와 마주치게 된다. 뮤지엄 만화규장각에 도착하면 건물의 입구부터 건물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공원 등 도처에서 만화 속 주인공들을 만나게 된다. 실물 크기로 제작된 이 조형물들은 장식물이자, 뮤지엄 만화규장각의 사인(Sign)으로 활용되며 오가는 시민들을 안내한다. 수많은 만화 캐릭터들과 인사를 나누다 보니 어느덧 ‘만화박물관’이 눈앞에 나타났다.
이곳에는 국내 유명 만화들의 부스가 꾸며져 있는데, 조형물은 물론 디지털미디어까지 활용해 추억의 만화들을 오감으로 느낄 수 있게 했다. 가장 먼저 눈에 띄는 부스는 지난 1980년대 청소년은 물론 성인들까지 만화의 세계로 빠뜨렸던 이현세 화백의 ‘공포의 외인구단’. 이곳에서는 만화의 주인공 오혜성이 배트를 부여잡고 당신의 공을 기다리고 있다. 당연히 실제 상황은 아니지만, 인터랙티브 디지털미디어를 활용해 만든 이 체험시설은 묘한 승부욕을 자극한다.
“난 네가 좋아하는 일이라면 뭐든지 할 수 있어!”라는 명대사로 남겼던 이 만화를 보며 ‘나도 까치처럼 살테야!’ 라고 부르짖던 소년들. 그들은 그 시절 다짐처럼 사랑하는 이를 위해 뭐든지 할 수 있는 남자가 됐을까? 외인구단의 야구장 옆에는 2130년 태백산을 배경으로 ‘라이파이’와 우주에서 온 ‘녹의 여왕’의 대결이 숨가쁘게 펼쳐진다. ‘ㄹ’자를 새겨 넣은 두건을 쓴 라이파이는 로켓분사기를 등에 메고 하늘을 자유롭게 날아다니며 악당을 물리친다. 레이저광선을 구름에 비추어 영상을 나타내는 홀로그램과 지구와 우주를 오가는 우주왕복선 제비호도 이채롭다. 김산호 화백이 1959년에 첫 선을 보여 전국 어린이들의 손에 땀을 쥐게 했던 우리나라 최초의 장편 SF 만화 ‘라이파이’를 재현해 놓은 모습이다. 만화 속 시대를 앞선 상상력은 그 시절 코흘리개 어린이들에게 새로운 꿈과 비전을 선물했다.
1970년대 만화방에서 옛 추억 떠올려 볼까?
뮤지엄 만화규장각에서는 1970년대의 모습을 그대로 재현해 놓은 ‘만화방’의 모습도 만날 수 있다. 벽을 따라 길게 이어진 딱딱한 나무의자. 그리고 가운데에는 연탄난로 하나가 덩그렇게 놓여 있다. 벽에는 만화책들이 빼곡히 들어차 있다. 만화책들이 앞으로 떨어지지 않게 검정 고무줄로 둘러쳐 있는데 ‘수퍼스타 강가딘’, ‘꺼벙이’, ‘주먹대장’,
‘코미디 홍길동’, ‘심술통‘ 등등 1970년대 소년시절을 보냈던 이들이라면 흠뻑 향수에 빠지게 될 법한 그 시절의 모습이 그대로 재현돼 있다. 인터넷과 컴퓨터는 물론, TV가 있는 집도 드물었던 시절에 만화방은 소년들에게 최고의 문화공간이 아니었을까? 만화책 한 권을 빌려보는데 10원이었다는 그 때, 용돈만 생기면 만화방으로 달려갔을 빡빡머리 소년과 단발머리 소녀들의 모습이 문득 투영된다. 속편은 나왔는지, 또 내가 찜해둔 만화책을 누가 먼저 읽고 있지는 않은지 마음을 졸이며 만화방 미닫이문을 열고 들어갔을 그들. ‘또 여기서 만화 보고 있냐’며 한바탕 꾸중을 듣고 어머니 손에 끌려 나가는 모습도 상상되며 웃음 짓게 된다. 하지만 그 만화방에서 소년소녀들은 만화주인공들과 함께 꿈을 꾸고, 사랑을 하며 인생을 배워 갔을 것이다.
‘만화방’을 나와 걷다보니 저 쪽으로 ‘고바우 영감’의 모습이 보인다. 무슨 일일까? 멀리서 걸어오는 사내들의 모습에 “앗 저기 온다”하며 주변사람들이 바짝 긴장한다. 사내들은 어깨에 지게를 진 채 “어흠”하며 거드름을 피운다. 지나가는 이들은 “귀하신 몸 행차하시나이까?”하고 머리 숙여 인사하는데, 이를 이상하게 여긴 고바우 영감이 사내들에게 묻는다. “저 어른이 누구신가요?” 사내들 가운데 한 사람이 “쉿”하며 목소리를 낮추라고 한다. 잠시 후 이 사내가 말한다. “경무대에서 똥을 치는 분이요.” 1958년 1월 23일자 동아일보에 실린 김성환 화백의 시사만화 ‘고바우 영감’의 한 장면이 벽면에 그려져 있다. 이승만 정권시절 하늘 높은 줄 모르던 경무대의 위세를 꼬집은 이른바 ‘경무대 똥통사건’. 이 사건으로 인해 김화백은 경범죄로 즉결심판을 받게 된다.
서민의 애환을 따뜻하게 달래며 권력의 부조리를 준엄하게 풍자한 ‘고바우 영감’은 이제 추억 속으로 사라졌건만, 30년이나 지난 지금도 시대는 크게 변하지 않은 것 같다. 문득 고바우 영감이 그리워진다.
‘만화가의 머릿속에 뭐가 들었을까?’
4층으로 올라서면 원고를 그리다 말고 쿨쿨 잠에 빠져있는 거대한 만화가가 보인다. 이 때 전화기 속에서 한 여성의 날선 전화음성이 들린다. 1980년대 대표적인 월간 만화잡지였던 ‘보물섬’ 편집기자의 목소리다. “선생님~ 보물섬 권기자예요. 왜 전화 안 받으세요. 내일이 마감이신건 아시죠. 지난 번 처럼 늦으면 절대 안돼요. 저 인쇄소에서 욕 바가지로 먹었다구요. 편집장님도 화가 머리 끝까지 나셨구요. 혹시 지금 주무시는 거 아니죠. 만약 이번에도 늦으시면 저 처녀귀신이 돼서 평생 괴롭힐거예요!”
만화가가 잠든 사이 궁금했던 그의 머릿속에 들어가 무한 상상력을 체험해보는 코너인 ‘만화가의 방’. 항상 마감시간에 쫓기며 새로운 이야기와 인물들을 만들어내는 만화가의 머릿속에는 정말 뭐가 들어있을까. 만화가의 머릿속으로 직접 들어가 볼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