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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9.09 14:40

‘알고보면 간판 속에 예술이 있다’

  • 이승희기자 | 204호 | 2010-09-09 | 조회수 5,681 Copy Link 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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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브제·옵아트 등 미술과 간판의 컨버전스 사례 등장
 차별화된 디자인의 대안으로 서서히 도입 움직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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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으로 직접 그려 만든 간판. 표현하는 공간이 하얀 캔버스가 아닌 상업공간이라는 차이는 있지만 간판도 일종의 예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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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생활에서 사용하는 물체를 간판에 적용, 본래의 목적 대신 광고 수단으로 사용한 일종의 오브제 간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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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상미술의 장르인 옵아트를 적용한 간판 사례. 기하학적인 형태와 색채의 장력을 이용해 착시 효과를 유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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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예술인 서예를 바탕으로 디자인한 서체 ‘캘리그라피’를 적용한 간판. 
 
 
간판이라는 개념이 국내에 처음 도입됐을 당시 어떤 간판들이 유행했는지 기억하는가.
함석 간판도 많이 사용했지만, 손으로 직접 그려넣는 간판도 흔히 볼 수 있는 간판의 한 종류였다. 화공들이 오로지 인력으로 만들어냈던 그 간판들은 주로 극장에 영화 홍보용으로 걸리는 경우가 많았다.
 
디지털에 과도하게 의존하는 작금의 간판과 더욱 비교가 돼서 그럴까. 당시의 아날로그 간판에서는 장인의 숨결마저 느껴졌다. 사실 따지고 보면 그때 화공들이 그려냈던 그 간판들은 일종의 예술이었다. 단지 공간이 하얀 캔버스에서 상업 공간으로 옮겨졌다는 차이만 있을 뿐, 그 간판들은 굳이 예술의 장르로 따지자면 바로 미술이었다. 그야말로 간판과 예술의 컨버전스다.
 
하지만 1990년대 이후 플렉스 간판과 같이 지나치게 디지털에 의존하는 간판들이 거리에 넘쳐나자, 간판의 예술성은 점차 잊혀지고 갈수록 하급 문화로 치부됐다. 그도 그럴것이 1990년대 이후의 간판들은 대부분 현란한 컬러와 큰 규모만을 경쟁적으로 내세우는데 급급했다. 
 
그러다 최근들어 국내 간판문화에 대한 문제의식이 커졌고, 이를 탈피하기 위해서는 간판에 ‘디자인’이 더해져야 한다는 인식이 정부 및 지자체 등 공공기관의 주도로 확산되고 있다. 또 이는 전국 곳곳에서 이뤄지고 있는 간판과 관련된 각종 시범사업을 통해 실천되고 있다.
이들 사업을 통해 간판이 점차 디자인되고 있는 가운데, 잠시 실종됐던 간판의 예술성도 다시금 고개를 쳐들고 있는 모습이다. 드물긴 하지만 차별화된 디자인을 예술의 장르에서 차용하려는 시도들이 이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일례가 바로 ‘오브제 간판’이다. ‘오브제(Ovejet)’는 미술 분야에서 사용하는 전문용어로, 일상에서는 어떤 목적에 따라 사용되는 물건이지만 예술가가 작품에 끌어들여 본래의 목적이 아닌 전혀 다른 의미로 사용하는 것을 뜻한다.
보통 간판에서는 매장에서 판매하고자 하는 대표적인 상품을 간판에 직접 인용함으로서 오브제를 표현한다. 예를 들어 ‘구두전문점 간판에는 구두를’, ‘문구점 간판에는 클립을’ 적용하는 식이다.
 
구두나 클립과 같은 물체는 일상에서 어떤 목적을 가지고 사용되지만 간판에 사용될 경우 그 자체가 하나의 광고를 표현하는 수단으로 의미가 달라지기 때문에 일종의 오브제가 되는 것이다. 오브제 간판은 보통 매장을 대표하는 상품을 간판에 적용하므로 매장의 정체성을 표현하는데 유용해 다른 예술 장르에 비해서 간판과의 컨버전스 역사가 길고 보다 보편화돼 있는 편이다.        
 
최근에는 추상미술의 한 장르인 ‘옵아트’를 간판에 적용한 사례도 등장했다. 고양시 덕양구청 앞에 위치한 장원프라자, 비젼타워21 두 건물에 설치
된 간판이 바로 그것이다. 옵아트는 ‘옵티컬 아트(Optical Art)’의 준말로 기하학적 형태나 색채의 장력을 이용해 시각적 착각을 유발하는 추상미술의 한 장르다. 바둑판무늬, 동심원 같이 단순하고 반복적인 형태의 화면을 의도적으로 제작하고 명도가 같은 보색을 병렬시켜 색채의 긴장상태를 유도하고 수용자에게 그림이 움직이는 듯한 착시를 일으킨다.
 
이번 고양시 간판 사례는 강화유리에 세로로 반복되는 선을 표현한 것으로, 유리 안쪽에 장미 문양을 넣어 시민들이 보행시 보는 각도에 따라 문양이 다르게 보이도록 표현했다.
 
오브제, 옵아트와 같이 서양 미술 뿐 아니라 국내 전통 예술을 컨버전스하려는 시도도 이어지고 있다. 때로는 간판에 공예적인 요소를 담기도 하며, 서예를 현대적 디자인으로 재탄생시킨 캘리그라피를 도입하기도 한다. 특히 이런 간판은 전통적인 요소들이 남아있는 인사동이나 전주 한옥마을 같은 곳에서 흔히 볼 수 있다. 
 
이렇게 ‘모르는 사이에 조금씩 조금씩’ 간판이 예술과 컨버전스되는 동안 역으로 간판을 예술의 소재로 사용하는 시도도 등장하고 있다. 지난해 KT&G상상마당과 전시그룹 글책말의 주체로 열렸던 상상마당의 ‘간판투성이 전’이 대표적인 일례다. 한글을 이용해 간판의 새로운 가능성을 모색하기 위해 개최한 이 전시회에는 25명의 순수 예술 작가, 디자이너들의 상상력과 예술성을 담은 대안의 간판들이 전시됐다. 이밖에도 일부 예술 작가들이 간판을 소재로 전시회를 개최하는 경우도 종종 생겨나고 있다.
 
상업공간에 표현되는 예술, 이렇게 간판은 서서히 예술과의 경계를 넘나들며 자연스럽게 공공의 영역에 스며들고 있다. 국내간판문화에 대한 문제의식이 점차 고조되고 있는 가운데 간판과 예술의 컨버전스 시도는 앞으로 더욱 가속화될 전망이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손으로 글씨를 쓰고 그림을 그려 시작된 간판은 원래 그 차제가 예술이 아니었을까. 어쩌면 지금은 간판의 예술성을 되찾는 과정인지도 모르겠다.

이승희 기자 [ⓒ SP투데이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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