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한중 기자 | 205호 | 2010-09-28 | 조회수 2,9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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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려진 것들이 지닌 아름다움에 주목하다’
낡은 드럼통·조각난 나무판자가 이색 간판으로 재탄생 재활용 소재에 캘리그라피 접목해 새로운 가치 창조
경기도 파주시 헤이리 예술마을에 위치한 친환경 쇼핑몰 ‘지렁이다’.
건물의 정면과 좌측면에는 파주 고물상에서 주워온 낡은 드럼통 뚜껑으로 만든 사인이 붙어있다.
‘농부로부터’온 것은 바로 농산품이겠지? 간판에 적힌 문구에서 색다른 감수성이 느껴진다.
리폼샵 ‘일급 기능사의 집’
풀을 팔고 있다.
비가 내리면 거리 곳곳에 출몰해 어린 소년, 소녀들을 깜짝 놀래키던 지렁이. 언제부턴가 도심에서는 그 모습을 볼 수 없음에 아쉬웠던 차, 한 농부가 헤이리 예술마을에서 초대형 지렁이를 열심히 키우고 있다는 소식이 접수됐다.
▲소비의 새로운 의미 깨닫는 생산적 쇼핑몰 “어라 지렁이가 아니라 ‘지렁이다’네~” 경기도 파주시에 위치한 헤이리 예술마을. 이곳에 지난 4월 요상한 간판을 단 3층 건물 하나가 등장했다. 간판에 적힌 이름은 바로 ‘지렁이다’이다.
‘지렁이다’는 농촌 디자인 컨설팅업체 쌈지농부(대표 천호균)가 농촌진흥청과 함께 설립, 운영하고 있는 친환경 전문 쇼핑몰이다. 이곳에서는 유기농 로컬푸드, 재활용 패션상품, 친환경 문구, 빈티지 그릇 등 우리의 의식주 전반에 걸친 친환경 상품(지렁이다 내에서는 ‘착한상품’이라 부른다)을 만날 수 있다.
또한 대장간, 리폼가게, 수제 구두방 등 생산과 판매가 동시에 이뤄지는 가게들도 있어 단순히 제품을 판매할 뿐 아니라 손님들에게 제품을 만드는 과정 전체를 생생하게 보여준다. 이처럼 ‘지렁이다’ 내에서 소비자들은 제품의 생산 과정을 하나하나 생산자와 공유하게 되고, 이로 인해 쉽게 사고 버리는 물건의 가치에 대해 다시 생각할 수 있게 된다.
즉 ‘지렁이다’는 소비를 매개로 운영되지만, 현재의 생산·소비 시스템에 대한 소박한 대안이기도 하다. 재활용품의 사용을 권장하고 소비문화와 생산 과정을 연결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생산자와의 관계, 생산 과정이 지워진 현재의 소비 중심 문화는 자연을 망가뜨리고 인간성까지 파괴하는 결과를 낳고 있다.
결국 물건을 만들고 쓰는 것의 의미를 깨닫는 것은 도시 문화의 문제점을 반추하고 자연친화적 삶으로 향하는 출발점이라는 게 ‘지렁이다’를 운영하는 쌈지농부 측의 철학이다.
▲미술과 만난 고물… 독창적 간판으로 변신 ‘지렁이다’의 건물은 노출 콘크리트 방식의 현대적 건축양식으로 지어졌다. 그러나 기본적인 건축골재와 마감재를 재외한 모든 인테리어 및 익스테리어는 모두 낡은 폐자재를 활용한 작품으로 꾸며졌다.
파주 고물상에서 주워온 드럼통, 낡은 널빤지, 바닷가에서 건져온 부표와 그물 등 누군가에 의해 버려진 물건들을 미술작업을 통해 새롭게 변화시켜 사용하고 있는 것.
특히 건물 내·외부를 장식한 사인물의 경우, ‘지렁이다’만의 독특한 분위기를 구성하는 주역이다. 다양한 재활용 소재에 아트디렉터 이진경 작가의 독특한 캘리그라피를 그려 넣음으로써 구석구석 따뜻하고 정겨운 감성이 배어 나오게 했다. 묘하게 친근한 느낌으로 사람들을 이끄는 ‘지렁이다’의 이미지는 이작가의 작품(간판)에서 풍기는 아우라를 통해 이뤄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대충대충 그린 듯 먹이 흘러내리고 거친 붓의 질감까지 고스란히 살아있는 손 글씨 간판들은 아날로그적 감성을 그리워하는 도시인들에게 색다르면서도 익숙한 모습으로 다가온다.
쌈지농부 관계자는 “버려지거나 낡아서 아무도 사용하지 않는 옛날 물건들, 길가의 들풀, 혹은 작은 종이 한 장속에도 자연의 생명과 세월의 추억 등 가늠할 수 없는 가치가 담겨있다”며 “소리 없이 땀 흘리며 거칠고 메마른 흙을 건강한 흙으로 되돌리는 지렁이처럼 낡고 오래돼 버려진 것들을 재발견하고 새로운 가치를 부여하는 곳이 바로 ‘지렁이다’”라고 설명했다. 순수한 자연에 대한 존경심과 정성 깃든 장인의 손길, 작은 것과 버려진 것들의 아름다움을 주목하는 이 ‘지렁이’가 작은 것의 가치를 소중히 여기는 마음 그대로 쑥쑥 자라나길 기대해 본다.
※캘리그라피
캘리그라피는 손글씨 붓으로 쓴 글씨로 직역되기도 하지만 2000년대 초부터 시작된 캘리그래라는 10년이라는 세월이 흐르면서 한국의 문화를 담는 한국디자인의 하나의 특징으로 자리매김했다. 또한 처음에는 영화포스터나, 책자의 표지 디자인 부분에만 한정적으로 사용되던 것이 이제는 감성 마케팅이라는 이름으로 제품 및 간판 등 다양한 영역에서 활용되고 있다.
너 그리고 나, 우리 모두를 위한 디자인.
버려진 폐자재들로 만들어진 실외 매장. 소금과 숯을 판매한다.
지렁이다의 내부 전경. 버려진 부표로 만든 거대한 포도조형물, 녹슨 철조망으로 이뤄진 파티션 등 모든 인테리어 소품이 재활용 소재로 만들어졌다.
재활용품을 판매하는 진열대 옆에는 ‘재개발’이라고 적힌 커다란 간판이 붙어있다. 흔히 재개발아파트 지역에 붙어 위험한 분위기를 풍기는 붉은색 간판이 ‘지렁이다’에서는 색다른 재활용 상품들을 안내하는 사인으로 사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