짙은 솔벤트 냄새, 시트지를 밀어내며 쉴새없이 돌아가는 실사기 소리. 컴퓨터 앞에 앉아 키보드와 마우스를 조정해 디자인을 수정하는 풍경. 너무나 익숙해진 지금의 간판집 풍경이다.
각종 디지털 산업의 성장과 함께 옥외광고 업계의 제작 메커니즘도 디지털화되고 실사출력이라는 새로운 시장이 창출됐다. 실사출력이 하나의 산업으로 등장하고 성장하면서 어떤 이미지도 빠른 속도로 원하는 만큼 찍어낼 수 있는 편리한 세상이 됐다.
이같은 편리함에 익숙해지고 의존도를 높여가고 있는 가운데 조용히 사라지고 잊혀져 가는 것들이 있다. 손으로 그린 극장 간판, 펜스, 포스터... 거리와 매장 곳곳에 넘쳐나는 실사출력물 가운데서 만나는 손으로 그린 사인물들은 신기하고 반갑게까지 느껴질 정도로 희귀하고 진귀한 것들이 돼가고 있다. 점차 사라져가고 있기 때문이다.
컴퓨터 실사기가 도입되기 전만해도 각종 이미지들은 사람의 손때를 입고 태어났다. 간판 미술가 김경곤(67)씨의 손을 거쳐간 작업만해도 수백여개에 이른다. 김씨는 50년 넘게 도시의 사인물들을 그려온 베테랑 간판 미술가다. 세상은 변하고 그릴 것도 많이 줄어들었지만 그는 50년 전도 지금도, 도시 곳곳의 사인물들을 직접 손으로 그려오고 있다.
“컴퓨터 실사기에 밀리다 보니 손으로 할 일은 점점 줄어드네요” 김씨의 첫마디다. 사라져가고 잊혀져가는 것들에 대한 안타까움이 묻어난다.
하지만 그는 이내 “일은 점점 줄고 있지만 아직까지 제 손을 유용하게 쓸 수 있어서 좋아요”라며 유쾌하게 웃어 보인다. 70을 바라보는 지금까지도 일을 할 수 있게 해주는 손에 감사하다는 그다.
김씨가 화공일을 처음 시작한 것은 중학교 졸업 후 17세 되던 해다. 어릴 적부터 그림을 좋아했던 그는 중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무작정 극장 미술부에 들어갔다.
“당시 극장 미술부는 막내부터 미술부장까지 서열이 엄격하게 정해져 있었다”며 그는 막내로 들어가 선임자들이 그림을 그릴 수 있도록 물감을 섞고, 붓을 빨고, 작업실을 청소하는 보조 역할을 2~3년 남짓했다. 보수도 없었고 얻을 수 있는 것은 그저 주린 배를 채울 수 있는 점심 한끼였다. 하지만 그림을 배우고 싶었던 그는 그렇게 극장 미술부에 다니면서 어깨너머로 그림을 배웠다.
“그림을 직접 배우기 전에 처음 배우는 것이 글씨를 쓰는 것”이었다. 글씨 쓰는 재주도 남달랐던 그는 당시 자신만의 고유의 서체를 만들어 사용했는데, 그 글씨는 당시 그의 주무대였던 익산 지역의 간판 미술가들 사이에서 유행할 정도로 유명세를 타기도 했다. 김씨의 서체는 어릴 적 집에서 부르던 이름을 따 ‘경수체’라는 별명까지 따라 붙게 됐다.
글씨와 그림을 배우며 극장일을 하던 그는 곧 군대에 가야했고, 극장일을 관두게 됐다. 하지만 그림과 함께한 그의 인생은 군생활에서도 계속됐다. “글씨 잘 쓰고 그림 좀 그릴 줄 안다는 게 입소문을 타 차트글씨나 교육용 훈련그림들은 모두 나에게 맡겼죠” 그렇게해서 그는 하루에 큰 전지 130장을 혼자 다 써내고 그려나갔다.
제대 후 그는 그렇게 그림과 함께한 생활을 잠시 접고 간판집을 차려 경영에 나섰다. 그때 당시는 현판이나 표지판도 손으로 직접 그려 넣었기 때문에 그림과 함께 하는 그의 일상은 계속됐다. 15년 이상 간판집을 운영하며 큰 돈을 벌기도 하고 일이 없어 어려움을 겪기도 하는 등 흥망성쇄를 겪으며 지낸 그는 옥외광고업 외에 외식산업에 손을 댔다 사업의 실패를 경험하면서 다시 현장일을 시작했다.
“90년대 중반에는 배전함에도 직접 그림을 그려 넣었어요. 한때 배전함 그리는 일로 돈을 많이 벌기도 했는데, 그 일도 2002년 월드컵 이후로는 사라지고 실사출력으로 전부 교체되더라고요”라며 그는 당시를 회고했다.
그가 그린 것은 비단 배전함만이 아니었다. 놀이터나 공원의 벽화, 백화점의 대형 현수막에서 실내 인테리어용 그림까지 도시를 이루는 모든 것은 그의 손을 거쳤다.
그렇게 참여한 작업만해도 수백가지가 넘지만 그가 그린 흔적을 찾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대부분이 옥외에서 이뤄지는 일시적인 이벤트성 작업이기 때문에 길어야 2~3년 보존되는 게 고작이다.
“처음에는 애써 그린 것들이 지워지는게 허무하기도 했지만, 일을 하도 많이 하다보니 지금은 그런 것엔 미련도 없어요” 50년이 넘는 오랜 세월 그리고 지워지는 것을 경험하면서 이골이 난 듯 하다. 하지만 그의 손때가 묻은 작업이 5~6년 넘게 보존돼 오고 있는 것도 있다. “신탄진역 옆에 고가도로 벽에 KTX고속전철을 그려 넣은 게 있었는데 그 그림은 여전히 남아있다”며 그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함께 일하던 동료들이 모두 은퇴하고 떠난 지금도 여전히 그는 바깥에서 펜스를 그리고 벽화를 그린다. 지금 함께 일하는 동료들도 대부분이 후배들이다.
“교수, 박사, 대기업 임원 등 사회적으로 지위가 높은 친구들이 있는데 젊을 땐 그 친구들이 부러웠지만, 지금은 하나도 부럽지 않아요” 또래의 친구들보다 훨씬 싱싱하고 젊다고 스스로 자부하기 때문에 부럽지 않다는 뜻이다.
도시에 숨결을 불어넣는 작업을 해서 그런지 그는 실제로 67세라는 나이를 망각하게 할 정도의 찰진 모찌 피부와 다부진 체격을 갖추고 있었다. 그는 “현장 작업에 대비해 체력관리를 꾸준히 해오고 있어요”라며 “제 몸이 움직일 수 있을 때까지 그리고 또 그릴 것입니다”라고 단호하게 말했다.
50년 넘게 간판을 그려온 사람 김경곤씨는, 잊혀져 가고 사라져 가고 있는 간판 미술을 지키며 지금도 도시를 그려나가고 있다.
50년 넘게 간판을 그려온 간판 미술가 김경곤씨. 올해로 67세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현장일을 해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