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한중 기자 | 217호 | 2011-03-30 | 조회수 2,202
Copy Link
인기
2,202
0
모던함으로 채색된 아날로그 감성의 거리
뒤처진 듯 세련되고, 유난하지 않지만 돋보여
“잘 보이고 싶은 마음 너무 그렇게 웃을 건 없잖아요! 뽐내며 살기도 힘들어요.” 웃음이 ‘피식’ 새어 나온다. 주목 받고 싶은 여자의 마음을 이렇듯 얄밉도록 솔직하게 표현할 수 있을까. 서울 강남구 신사동 가로수길. 이곳에서는 공사 현장을 가리는 가림막도 평범하지 않다. 신사동 가로수길의 풍경은 강남 특유의 그것과는 성격이 다르다. 처진 듯 세련되고, 유난하지 않지만 돋보인다. 테라스형 카페에 앉아 즐기는 커피 한잔, 이국적인 레스토랑에서 브런치를 즐기는 여유, 작지만 개성 있는 디자이너들의 패션숍에서 즐기는 쇼핑…. 마치 작은 유럽을 연상시키는 독특한 분위기로 이름난 곳, 신사동 가로수길의 풍경을 담아봤다.
신발 브랜드 ‘캠퍼’ 가로수길점. 별도의 간판을 부착하는 대신 윈도우 디스플레이 활용한 사인을 구성했다. 발자국 모양의 배너를 매장 건물 상단에 부착해 신발 매장이라는 것을 강조한 점도 인상적이다.
찾집 ‘그랜드’는 상호의 영문 스펠링이 적힌 5개의 둥근 할로겐 램프를 간판 대용으로 사용한다. 해가 지고 조명이 가동되면 램프가 켜지는데, 스펠링이 적힌 부분은 빛이 가려지면 부각되는 독특한 효과가 나타난다.
“잘 보이고 싶은 마음 너무 그렇게 웃을 건 없잖아요! 뽐내며 살기도 힘들어요.” 의류점포가 들어설 공사부지의 가림막이 가로수길을 구경하는 재미를 더한다.
가로수길은 다양한 브랜드의 팝업스토어를 볼 수 있는 장소로도 유명하다. 사진은 최근 등장한 쉐보레의 팝업 스토어로, 유리창 안쪽으로 영화 트렌스포머의 히어로 ‘범블비’의 모습도 볼 수 있다.
헤어숍 ‘프랑크프로보’의 사인. 아크릴 박스 안쪽으로 ‘7’자형으로 부착된 형광등의 모습을 도드라지게 한 것인 이색적이다.
글자마다 다른 채널사인의 색상이 독특한 이미지를 연출한다.
코르텐강으로 제작된 층별 안내사인. 빈티지한 매력이 물씬 풍긴다. 사인 옆에 부착된 보드카 형태의 기구물도 매력적이다.
이제는 잊혀지다시피한 네온도 가로수길에서는 심심찮게 만나볼 수 있다.
특별해 보이지 않는 골목에서도 시선을 사로잡는 간판들을 만나게 되는 것은 가로수 길만이 지닌 매력이다.
▲개방된 거리에서 느끼는 무언의 교류 가로수길은 도로 뿐 아니라 보도도 좁은 편이다. 하지만 이러한 단점이 이곳에서 만큼은 장점으로 전환된다. 700m에 이르는 이 길에서는 길 건너 카페에서 사람들이 커피를 마시는 것까지 훤히 보인다. 그래서 서로 감추는 게 별로 없다. 아예 모든 의자가 창을 향하고 있는 카페까지 있을 정도다. 의도됐든, 아니든 간에 ‘드러낸다’ 는 컨셉트를 가지고 있는 게 바로 가로수길이다. 이는 청담동의 폐쇄성과 정반대이며, ‘앞서간다’는 이름으로 치장한 압구정이나 강남역에서 흔히 마주하게 되는 혼란스러움과 다르다.
다른 어떤 거리보다도 개방되어 있는 이곳, 가로수 길은 지나가는 행인들도 카페 안쪽을 들여다보고 카페에 앉아 있는 사람들도 바깥쪽 사람들을 구경한다. 직접 대화를 나누지는 않지만 열린 마음으로 서로를 대하는 잔잔한 풍경을 볼 수 있다. 말없이 서로 교류하는 장점을 즐기는 것이다.
▲가로수길, 문화와 개성을 입고 ‘제대로 떴다’ 신사역에서 압구정 현대고등학교까지 670m에 이르는 구간이 바로 가로수길이다. 2차로 도로를 품에 안고 있는 이 길은 가을이 되면 양옆에 도열해 있는 은행나무들이 거리를 노랗게 물들이는 낭만적인 분위기로 잘 알려져 있다.
2차선 도로를 끼고 있지만, 적당히 눈치 보며 지나다닐 수 있을 만큼 비좁은 이 거리에 사람들이 북적거리기 시작한 것은 3년 전 쯤 부터인데, 그 전에도 이곳은 대중적이지만 않았지만 매니아 층을 확보하고 있던 거리였다.
가로수길에 사람들이 열광하는 이유는 은행잎이 만드는 로맨틱한 분위기보다 예술과 문화의 거리라는 이미지 때문이다.
지금은 가로수길의 랜드마크가 된 예화랑이 이곳에 자리를 잡은 게 1982년인데, 이후 골동품이며 액자, 갤러리숍 등이 하나둘 들어서며 점차 예술적인 풍모를 띠게 됐다. 이즈음 거리 인근에 위치한 패션학교 ‘에스모드’ 출신이자 유학생활을 거친 신진 패션디자이너들이 이 거리를 중심으로 자신의 이름을 건 패션숍을 내기 시작하면서 ‘디자이너 거리’로서의 정체성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아르마니, 베네통, 쉐비뇽 등 내로라하는 해외 의류 브랜드의 직영점이 모두 이곳에 자리잡게 된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1990년대 후반 IMF 사태를 겪으며 당시의 갤러리숍과 의류 패션숍들은 한차례 세대교체가 되긴 했지만 그들이 쌓아 놓은 문화적인 색채는 쉽게 가시지 않았다. 새롭게 오밀조밀 둥지를 튼 개인 디자이너들의 패션숍들이 나타나는 한편, 유럽풍 카페와 레스토랑까지 하나둘 자리를 잡기 시작하며 가로수길은 현재 서울에서 가장 ‘핫(hot)’한 플레이스로 부상했다.
▲‘아날로그色’ 짙은 간판… 독특한 풍경 연출 MP3를 달고 사는 요즘 젊은이들에게 LP판이 돌아가는 아날로그 전축은 단순한 고물이 아니다. 오히려 첨단 디지털오디오 이상의 가치를 담은 문화 콘텐츠로서 높은 프리미엄이 붙어 매니아들의 소비욕을 자극하기도 한다.
이처럼 신사동 가로수길은 오래된 전축, 또는 낡았지만 잘 관리된 클래식 카를 만났을 때와 같은 독특한 풍경으로 시민들의 발길을 유혹한다. 특히 거리의 간판들이 이런 분위기를 형성하는데 일조하고 있다.
LED와 채널사인이 대세를 이루는 게 최근의 간판 트렌드이건만, 간판 문화가 멋진 거리로 손꼽히는 이곳에는 LED간판이 드물다. 형광등과 백열등, 네온을 사용하는 간판이 주를 이으며, 아예 조명을 사용하지 않는 경우도 많다.
대부분의 간판들이 유행이 지나간 낡은 소재들로 만들어졌지만, 삼청동이나 인사동의 그것처럼 너무 예스러운 느낌은 들지 않는다. 소재와 아이디어, 디자인이 절묘하게 어우러진 까닭이다. 오래된 어머니의 정장을 자신만의 스타일로 멋스럽게 소화해낸 아가씨를 보는 느낌이랄까? 모던과 빈티지의 경계에서 절묘한 균형을 잡고 있다.
철학자 이반 일리히는 인간이 최대의 가치를 생산해 낼 수 있는 속도가 24Km라고 말한다. 이 속도를 넘어서면 그 속도로 이동하게 위해 치르는 대가가 그것으로 얻는 이익을 훨씬 넘어선다는 말이다.
언젠가 얼핏 들었던 이 말이 가로수길을 거닐며 문득 머릿 속을 스치고 지나간다. 앞서 가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느리지도 않게 자신만의 스피드를 유유히 즐기고 있는 느낌. 그렇기에 젊은이들이 이 거리에 열광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