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한중 기자 | 224호 | 2011-07-14 | 조회수 1,6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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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는 히포크라테스의 명언처럼 예술작품들은 무한한 생명력을 가지고 우리의 생활 곳곳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그리스 로마 신화를 통해 나이키라는 브랜드가 등장했으며, 몬드리안의 그림이 20세기 제품 디자인의 모티브가 된 것처럼 말이다. 간판 또한 마찬가지다. 거리의 곳곳에는 명작의 향취을 담고 있는 간판들이 숨어 있다. 한 눈에 작품을 알아 볼 수도 있고, 우리가 인식하지 못하는 요소요소에 명작의 모티브를 숨겨놓은 재미있는 간판도 있다. 본지는 이처럼 간판 속에 담겨진 예술작품의 모습을 살펴보는 ‘간판, 명작을 품다’ 코너를 한국옥외광고센터와 공동으로 기획, 연재한다.
‘어린 왕자, 지구별 간판을 여행하다’ 동화 속 이미지 반영… 아련한 동심 상기시켜
어린 왕자 속의 삽화를 기대로 반영한 돌출 사인.
프랑스 문화 체험공간 ‘쁘띠프랑스’의 입구사인. 사인의 오른쪽 귀퉁이에 앉아있는 어린왕자의 모습이 인상적이다.
어린왕자가 사는 소혹성의 이름을 단 종로구 효자동의 북카페 B612의 사인.
남양주시 전원 카페 ‘꽃과 어린 왕자’의 사인.
안성의 카페 ‘여우가 말했다’의 사인.
“길들인다는 게 뭐지?” “그건 관계를 만든다는 뜻이야. 넌 아직 나에게 수많은 다른 소년들과 다를 바 없는 한 소년에 지나지 않아. 그래서 난 너를 필요로 하지 않지. 나는 빵을 먹지 않기 때문에 보리도 좋아하지 않아. 그런데 너는 금빛 머리카락을 가졌어. 그러니 네가 나를 길들인다면 난 황금빛 보리밭 사이를 지나가는 바람소리까지 사랑하게 될 거야.”
프랑스의 소설 어린왕자(생떽쥐베리作, 1943)는 전 세계인의 사랑을 받는 스테디셀러이자, 순수한 동심의 아이콘이다.
이 동화는 함축적인 어휘와 삽화로 전 세계의 소년소녀들에게 ‘관계’에 대해 설명한다.
저마다의 간판을 내건 매장들이 바라는 것은 바로 관계를 맺는 것이다. 비록 그 관계가 서로간의 필요에 의한 상업적 관계일지라도, 우리는 그 간판을 통해 무언가를 찾고 만나며 또 기다리게 된다.
그래서일까? 수많은 명작 중에서도 어린왕자는 간판의 상호나 디자인 모티브로서 유독 많이 활용되는 작품 중 하나다.
주인공인 어린왕자를 비롯해 친구인 장미와 여우, 어린왕자의 고향인 소혹성과 이별을 뒤덮고 있는 바오밥나무의 모습까지, 각각의 캐릭터들이 거리의 간판 속에서 때론 도시의 공공디자인 작품 속에서도 종종 그 모습을 드러낸다.
어린 왕자를 품은 이 간판들은 대개 수수한 모습을 가지고 있다. 숨겨진 양을 생각해야 하는 구멍 난 상자처럼 소박한 모습 속에서 간판 너머의 무언가를 상상하게 만든다.
가평에 위치한 프랑스 문화 체험공간 ‘쁘띠프랑스’의 입구사인에는 작은 어린왕자가 살포시 올라 앉아있다.
이 간판은 프랑스 문학을 대표하는 어린왕자의 모습을 통해 시민들의 호기심과 관심을 유도하는데, 어린왕자를 알고 있는 이라면 누구나 이 간판 앞에서 한 걸음 숨을 돌리고 가게 된다.
안성의 카페 ‘여우가 말했다’도 어린왕자의 이미지를 활용해 좋은 반응을 얻고 있는 공간이다. 이 카페의 곳곳에 어린왕자에게 ‘관계’의 의미를 가르쳐주는 여우를 모티브로 한 낡은 간판들과 벽화가 만들어져 있다.
이 모습에서 어린왕자를 처음 읽을 때의 감성을 다시 느낄 수 있다는 이유로 여행객들 사이에서 꼭 가봐야 할 ‘명소’로서 입소문을 타고 있다.
종로구 효자동에는 B612라는 이름이 사선으로 적힌 노란색 간판을 단 북카페가 있다. 동화를 읽은 이라면 눈치 챘겠지만, B612는 어린왕자가 사는 소혹성의 이름이다.
카페 B612는 이 간판으로 인해 ‘소혹성’이라는 애칭까지 얻으며 어린왕자를 추억하는 사람들의 애정을 담뿍 받고 있다.
보리밭을 싫어했던 여우가 어린왕자의 금발을 생각하며 가을날 황금빛 보리이삭을 스치는 바람소리까지 사랑하게 된 것처럼, 어린왕자의 파편이 담겨있는 간판만으로도 사람들은 그 가게까지 사랑하게 된다.
동화 속에서 여우가 어린왕자에게 말하는 관계의 힘이자, 명작이 지닌 힘이기도 하다. 어린왕자의 마지막 페이지는 이렇게 끝난다. 별들이 아름다운 것은 보이지 않는 꽃 한 송이가 피어있기 때문이며, 사막이 아름다운 이유는 어딘가에 샘을 감추고 있는 까닭이라고.
거리의 간판이 아름다운 것은 그곳을 찾았던 사람들의 가슴속에, 스쳐간 추억을 찾을 수 있게 하는 이정표로 남아있기 때문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