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한중 기자 | 226호 | 2011-08-16 | 조회수 2,774
Copy Link
인기
2,774
0
낡은 철공소 골목에서 예술의 싹 틔어 검게 때탄 건물과 녹슨 셔터 모든 게 ‘흰 캔버스’
서울 영등포구 문래동 3가의 낡은 골목은 도심 속 공장지대다. 온통 회색빛 공장 일색인 이곳은 ‘꽝, 꽝, 꽝’ 여기저기서 쇠 두들기는 소리가 골목을 가득 채우고 있다. 바람이라도 불라치면 쇳가루가 달려들고, 행여 용접 불꽃이 튀지나 않을까 몸을 움츠려야 한다. 요란한 소음과 함께 크고 작은 철공소들이 모여 있는 이곳에 언제부턴가 변화의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노동의 현장 속에 찾아온 예술의 향기로 인해서다. 이곳에선 낮에는 1층 철공소에서 노동 활동이 일어나고, 밤이 되면 건물 2·3층에 입주한 예술가들이 창작 활동에 몰두한다. 썩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예술과 쇳가루의 사이좋은 동거. 노동의 에너지와 젊은 예술가들의 창작 열기가 묘한 궁합을 이루는 이곳은 이제 ‘문래창작촌’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며 유명세를 얻고 있다.
문래역 7번 출구 앞에 세워진 문래창작촌의 인포메이션 부스. 철강들이 쌓아져 있는 모습을 형상화한 듯한 모습이 인상적이다.
철공소 건물을 가리는 양철 문짝들이 재미있는 미술작품으로 거듭났다.
낡은 건물과 담벽들마다 벽화들이 가득 그려져 있다.
어느 공장 벽면의 설치미술. 여러가지 병뚜껑을 모아 만든 작품이 이색적이다.
주인 아주머니의 일하는 모습을 건물에 그려 넣은 ‘복길이네 식당’.
노란가게로 더 잘 알려진 ‘충남상회’는 회색빛의 공장건물들 사이에서 노란색으로 채색된 모습이 마치 흑백영화 속에서 컬러 캐릭터를 보는 듯한 독특한 분위기를 연출한다.
작가들의 작업실을 알리는 문패도 각양각색이다. 찌그러진 양은그릇과 버려진 나무, 벽화 등 다양한 소재들로 만들어진 재미있는 간판들을 볼 수 있다.
문래창작촌에서는 벽화뿐 아니라, 여러가지 소재를 사용해 제작된 조소물도 곳곳에서 튀어 나온다. 골목골목을 뒤지다 보면 숨은 그림찾기를 하듯 다양한 예술작품들을 만날 수 있다. 실제로도 문래창작촌에서는 숨겨진 예술품들을 사진으로 찍어오면 소정의 상품을 주는 이벤트를 벌이기도 한다.
▲싼 임차료에 가난한 예술가들 몰려와
‘문익점의 목화 전래지’라 ‘문래동’이란 지명이 붙은 이곳은 그 이름처럼 1960년대까지 방직공장이 많았다. 개발시대의 아픈 그림자를 품고 살던 ‘젊은이’들이 이곳에서 땀을 흘렸다. 그 뒤 방직업이 쇠퇴하면서는 철공소들이 몰려와 ‘대한민국 철강재 판매 1번지’로서 호황을 누렸다.
그러나 도시의 변화는 쉼 없이 이어지기 마련. 2000년대 들어서면서는 철재 상가도 내리막을 걸었다. 업장들이 하나 둘씩 떠나고 이제는 덩치 큰 철공소 수십여개만이 덩그러니 남아있는 이곳은 시대와 어울리지 않는 옛 모습을 간직한 채 섬처럼 고립돼 있는 형상이다.
막연히 재개발만을 기다리고 있던 이곳에 언제부터인가 알음알음 가난한 예술가들이 찾아 들었다. 이유는 저렴한 임차료 때문이다.
그들의 아지트였던 홍대나 대학로 등의 상권이 커지면서 높아진 임차료를 감당하지 못한 예술가들이 서울에서 가장 월세가 싼 이곳을 찾기 시작하면서 자생적으로 문래창작촌이 탄생한 것이다.
매캐한 쇠냄새와 소음이 가득한 이곳은 평균적으로 3.3㎡당 월세 1만원을 내면 작업실을 얻을 수 있다. 또한 철공소라는 노동의 산실 속에서 예술적 영감을 얻을 수 있는 것도 큰 매력이다.
이곳에 입주한 예술가들이 건물이 낡아서 생기는 불편함과 철공소에서 나오는 각종 소음을 거뜬히 이겨내는 이유도 그 때문이라고.
현재 문래동에는 100여개의 작업 공간이 있고, 170여명의 예술가들이 상주하고 있다. 회화·설치·조각·디자인·일러스트·사진·영상·서예·영화·애니메이션 등 시각예술 장르를 비롯해 춤·연극·거리 퍼포먼스·전통예술·음악 등의 공연예술가와 비평·시나리오·문화기획 등 다양한 분야의 문화 활동가들이 꿈을 만들어 가고 있다.
▲예술을 입은 거리 도시의 명물로 부상
회색빛 건물, 어디선가 들리는 기계 소리, 공장지대 특유의 스산한 분위기로 가득했던 이곳에 예술가들이 유입되면서 많은 변화가 생겨났다.
오후 6시 무렵 문을 닫는 철재공장들의 내려진 셔터 위에는 알록달록한 색감의 그림들이 모습을 드러낸다.
낡고 때탄 건물과 담벽 곳곳에도 각양각색의 벽화들이 그려졌다. 이제는 철공소의 양철 문짝과 셔터, 허름한 건물의 계단과 내벽까지도 그림들이 가득 들어찼다. 버려진 공간이 캔버스가 됐고, 설치 작품의 전시대가 됐다. 이 그림들은 작가들이 자신이 입주해 있는 건물에 그려 놓은 일종의 푯말이다.
건물 곳곳에는 작업실의 간판도 달려있는데, 개성만점의 간판들이 낡은 공장건물에 달려 있는 풍경은 독특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우중충하고 오래된 상가 건물은 입구부터 옥상까지 누구나 마음대로 드나들 수 있다. 잠긴 문도 없고 경비도 없으니 제지당할 일도 없고, 가져갈 것이 없으니 누구나 반긴다. 상가의 옥탑마다, 계단마다 마음대로 색과 모양을 입혀 놓았다
지역의 명물로 자리 잡은 곳들도 생겨났다. ‘노란 가게’로 불리는 슈퍼마켓 ‘충남상회’와 건물 2층에 주인 아주머니의 사진이 커다랗게 그려져 있는 ‘복길네 식당’이 바로 그곳.
철공소 골목의 유일한 상점인 충남상회는 대학원에서 미술을 전공하는 학생들이 찾아와 가게 외관을 꾸몄다고 한다. 이후 달라진 분위기에 젊은 사람들이나 외국인 관광객들도 꽤 많이 찾아오는 명소가 됐다. “젊은 사람들이 많이 와요. 사진기 들고 와서 이곳저곳 찍고 가는 이들 때문에 매출도 좀 늘게 되더라구. 벽화 덕분에 거리에 생기가 넘치는 느낌이야.”
구멍가게에다 열심히 벽화를 그려준 손자 같은 학생들에게 보답으로 자장면을 사줬다는 충남상회 할머니가 요사이 거리 풍경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한다. 그는 삭막했던 철공소 골목에 그림이 생기니 아주 좋단다.
문래창작촌은 철공소 골목에 예술이 입혀지면서 새로운 가능성과 창조적 가치가 싹을 틔우고 있는 공간이다.
어두운 분위기였던 뉴욕의 브루클린이 화려한 그래피티 아트로 인해 문화공간으로 변화하고, 중국 베이징의 공장지대가 예술가들이 자리 잡으면서 ‘다산쯔 798 예술특구’가 됐듯이 공장가에 피어난 문래창작촌이 한국을 대표하는 예술특구가 될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