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희 기자 | 226호 | 2011-08-17 | 조회수 4,5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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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억원 가치의 ‘행복한 눈물’, 간판이 되다 팝아트, 트렌디한 간판·인테리어 소재로 종종 등장 간판 매개로 예술과 상업의 경계 이분화 허물어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는 히포크라테스의 명언처럼 예술작품들은 무한한 생명력을 가지고 우리의 생활 곳곳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그리스 로마 신화를 통해 나이키라는 브랜드가 등장했으며, 몬드리안의 그림이 20세기 제품 디자인의 모티브가 된 것처럼 말이다. 간판 또한 마찬가지다. 거리의 곳곳에는 명작의 향취을 담고 있는 간판들이 숨어 있다. 한 눈에 작품을 알아 볼 수도 있고, 우리가 인식하지 못하는 요소요소에 명작의 모티브를 숨겨놓은 재미있는 간판도 있다. 본지는 이처럼 간판 속에 담겨진 예술작품의 모습을 살펴보는 ‘간판, 명작을 품다’ 코너를 한국옥외광고센터와 공동으로 기획, 연재한다.
팝아트의 거장 로이 리히텐슈타인의 ‘행복한 눈물’.
‘행복한 눈물’의 작품이 풍선 형태의 간판 프레임에 담겨 트렌디한 느낌을 전달하고 있다.
로이 리히텐슈타인의 ‘메이비(M-Maybe)’, ‘거울속의 여자(Girl in Mirror)’를 응용한 간판. 커다란 간판 프레임 속에 실사출력된 채 담겨져 있는 팝아트가 인상깊게 다가온다.
한 빨간머리 여자가 두 손을 얼굴에 맞대고 눈물을 흘린다. 그 여자는 굵은 눈물방울을 내비치고 있지만 입꼬리가 올라간 걸 보면 어째 슬퍼서 우는 것 같지는 않다. 유명한 팝아트의 거장 로이 리히텐슈타인의 ‘행복한 눈물’ 속 장면이 그렇다. 국내에서는 삼성 비자금 사건으로 유명세를 탄 작품이기도 하다. 이같은 대기업의 비자금 스캔들이 아니라더라도 이 작품은 이미 대중에게 친숙하게 다가가고 있다. 나름 트렌디함을 표방한 최신의 간판 소재로 심심찮게 사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강남역 인근에 위치한 ‘섬씽엘스(Something L's)’라는 카페의 간판에 이 그림이 말풍선 형태의 프레임 속에 담겨져 있다.
행복한 눈물 외에도 로이 리히텐슈타인의 작품은 간판 소재로 종종 등장한다. 신사동 가로수길의 빈티지숍 ‘나인아울즈(9owls)’에는 해당 작가의 다른 작품인 ‘메이비(M-Maybe)’, ‘거울속의 여자(Girl in Mirror)’ 등이 커다란 간판 프레임 속에 실사출력된 채 담겨져 있다. 간판 뿐이랴. 커피숍이나 캐주얼 레스토랑 한 켠의 벽이나 바닥에서도 팝아트 거장의 작품을 만나게 된다. 거장의 작품에 기대어 커피를 마시고, 거장의 그림을 발로 밟고 다니기도 하는 셈이다.
어쩌면 이것이 팝아트가 추구하는 예술세계가 아니었을까. 팝아트란 ‘파퓰러 아트(Popular Art)’를 줄인 말로 대중문화와 미술을 결합한 1960년대 미국의 새로운 미술 흐름이었다. 텔레비전이나 매스 미디어, 상품광고, 쇼윈도, 고속도로변의 빌보드와 거리의 교통표지판 등 일상적인 것에서부터 코카 콜라, 만화 속의 주인공 등 대중적인 소비문화를 미술 속으로 끌어들임로써 순수예술과 대중예술의 경계를 허무는 하나의 사조였다. 팝아트의 선구자인 앤디워홀의 작품에서처럼 헐리우드의 전설적 섹스심볼 마릴린 먼로 그림이 하나의 예술작품이 되는 것이다.
빌보드나 간판, 상품광고 등 키치적인 것들을 예술로 끌어들인 게 팝아트인데, 간판은 이를 다시 대중 의 영역으로 끄집어낸다. 간판이 팝아트가 되고, 팝아트가 다시 간판이 된다는 것 자체가 흥미로운 대목이다. 간판이라는 매개를 통해 진정 예술과 대중문화가 소통하는 느낌이랄까. 앤디워홀은 미국, 유럽 등지에서 서민음식으로 자리매김한 캠벨스프의 깡통을 보고 그대로 그림을 그렸다. 그리고 그것은 팝아트의 선구자 앤디워홀이 그린 하나의 유명작품이 됐다.
훗날 전주시 남부시장에 위치한 청아젓집에서는 앤디워홀의 캠벨스프를 패러디한 간판을 내건다. 청아젓집은 마치 캠벨스프처럼 대중적이고 영원하다는 뜻을 의도하기라도 한것처럼 말이다. 심지어 팝아트는 대형 미디어파사드의 소재로도 사용된다. 2009년 서울시의 한복판에서는 영국출신의 세계적인 팝아티스트 줄리안 오피의 작품 ‘걸어다니는 사람(Walking People)’이 실제로 걸어다니기 시작한다.
서울역 맞은편 건물 서울스퀘어의 외벽에 줄리안 오피의 작품이 대형 LED전광판으로 재현된 것이다. 이렇게 팝아트는 동네 간판에서부터 도심지의 랜드마크로까지 일상에 깊숙이 침투하고 있다. 특히 간판에 있어서는 그동안의 식상함을 넘어서는 신선한 소재로 그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는 모습이다. 대중문화와 예술의 경계를 허무는 팝아트의 무질서함, 어쩌면 간판의 그것과 닮아있기 때문에 간판의 소재로 등장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