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한중 기자 | 230호 | 2011-10-17 | 조회수 5,3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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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는 히포크라테스의 명언처럼 예술작품들은 무한한 생명력을 가지고 우리의 생활 곳곳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그리스 로마 신화를 통해 나이키라는 브랜드가 등장했으며, 몬드리안의 그림이 20세기 제품 디자인의 모티브가 된 것처럼 말이다. 간판 또한 마찬가지다. 거리의 곳곳에는 명작의 향취을 담고 있는 간판들이 숨어 있다. 한 눈에 작품을 알아 볼 수도 있고, 우리가 인식하지 못하는 요소요소에 명작의 모티브를 숨겨놓은 재미있는 간판도 있다. 본지는 이처럼 간판 속에 담겨진 예술작품의 모습을 살펴보는 ‘간판, 명작을 품다’ 코너를 한국옥외광고센터와 공동으로 기획, 연재한다.
신화를 담은 간판, 새로운 신화를 꿈꾸다 신화적 모티브 디자인에 반영해 상징적 이미지 구축
스포츠 브랜드 나이키의 간판. 승리의 여신 ‘니케’의 날개를 형상화화 한 커다란 로고만으로도 효과적으로 브랜드를 홍보한다.
나이키 로고의 모티브가 된 사모트리케의 니케상.
존 윌리엄 워터하우스가 그린 ‘세이렌’.
아름다운 노래 소리로 향해하는 선원들을 유혹하는 신수 ‘세이렌’의 모습을 담아낸 스타벅스 간판.
레스토랑 ‘암브로시아’. 암브로시아는 올림프스의 신들이 먹는 음식으로 먹으면 영생을 얻게 된다고 한다
행운의 신 ‘티케’를 상호로 한 카페.
‘메두사’를 상호로 사용한 칵테일 바의 사인.
스포츠 의류매장 ‘나이키’, 커피 전문점 ‘스타벅스’ 각각의 분야에서 최고로 자리 잡은 이 두 브랜드의 간판에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바로 그리스 신화에서 빌려온 디자인 모티브가 숨어 있다는 점이다. 스포츠 의류 브랜드 나이키의 간판은 단순하다. 그저 초생달 모양의 자사 로고를 큼지막하게 걸어 놓았을 뿐이다. 이제는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그림 중 하나인 이 로고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승리의 여신 ‘니케(Nike)’의 날개를 형상화한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나이키라는 상호 역시 니케의 영어식 발음이다. 신화에서 티탄 신족의 하나인 팔라스와 저승에 흐르는 강의 여신 스틱스 사이에서 태어난 니케는 등에 커다란 날개를 달고 종려나무를 든 모습으로 표현된다. 이 여신은 페르시아와의 전쟁에서 승리한 조국에 소식을 전하기 위해 42.195㎞를 달린 그리스 병사가 기도를 드린 대상으로 유명하다.
뛰어난 품질과 기능, 아름답고 독창적인 디자인, 혁신적인 광고 등 오늘날 나이키를 세계 최고의 스포츠 브랜드로 성장시킨 요인은 수도 없이 많지만, 간판 속 로고가 일등공신의 역할을 했음은 부정하기 어렵다. ‘승리의 여신’이 함께 하는 스포츠 브랜드의 이미지를 구축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최초의 커피 체인이자 ‘테이크아웃 커피’라는 새로운 문화를 만들어낸 스타벅스의 간판에서도 그리스 신화의 편린을 찾을 수 있다. 바로 간판의 로고 안에 그려진 정체불명의 여인이 바로 그 주인공이다.
이 여성 그림은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세이렌(Siren)’이다. 강의 신 아켈로스와 스테로페 가 낳은 세이렌은 아름다운 여자의 얼굴과 날카로운 발톱을 가진 새의 모습을 한 신수인데, 항해하는 선원들을 노래로 유혹해 죽음에 이르게 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신화에서는 선원 자신의 몸을 배의 돛대나 기둥에 묶고 귀에는 밀납을 부어 소리를 듣지 못하게 해야 벗어날 수 있을 정도로 세이렌의 노래 소리에는 마력과 같은 유혹의 힘이 있다는 것으로 그려진다.
스타벅스의 로고에 세이렌의 모습이 등장하는 이유는 세이렌의 노래처럼 강렬하게 고객들을 유혹하겠다는 의지가 담겨있는 것으로 풀이할 수 있다. 세이렌의 마력 때문이었을까? 결국 전 세계의 커피 매니아들은 그야말로 홀리듯 스타벅스의 간판 아래로 이끌리고 말았다. 이 두 브랜드의 사례 외에도 우리 주변에서는 그리스 신화에서 모티브를 얻은 다양한 간판들의 모습을 심심찮게 찾아 볼 수 있다.
신들이 마시던 영생의 음식을 뜻하는 레스토랑 ‘암브로시아’, 행운의 여신 ‘티케’를 상호로 사용하는 카페, 끝없이 돌을 밀어 올려야 하는 형벌을 받은 시시프스에게서 영감을 얻은 공연장 ‘시시프스의 하늘’ 등 수많은 기업과 공간에서 그리스 신화 속 이야기들을 담은 간판을 내걸고 있다.
이처럼 신화에서 간판의 모티브를 빌려오는 이유는 간단하다. 친숙함과 상징성 때문이다. 우리는 어린 시절부터 동화나 소설 혹은 영화나 만화를 통해 그리스 신화 속의 신들을 접해왔다. 비록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허구라 해도 그들은 이미 익숙한 존재다.
또한 그리스 신화에서는 모든 자연현상과 인간의 감정들이 특유의 미화과정을 거쳐 인간적 캐릭터로 만들어낸다. 즉 모든 캐릭터들은 각각 세상의 현상들을 한 가지씩 설명하는 이야기를 품고 있는 것이다. ‘디오니소스’를 생각하면 술과 시를 떠올리게 되고, ‘아프로디테’에게서 물거품과 아름다움을 바로 떠올리게 되는 것은 그리스 신화의 이런 특징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그리스 신화의 한 자락을 따온 간판들은 특별한 설명 없이도 브랜드 정체성을 강조할 수 있을 뿐 아니라, 각각의 캐릭터들에게 내재된 스토리들이 상상력을 자극해 효과적인 브랜드 이미지 메이킹이 이뤄지게 한다. 이로 인해 그리스 신화는 아직도 많은 이들의 창업활동 및 마케팅에 영감을 주는 보고가 되고 있다.
신화를 간직한 간판들은 현대사회에서 새로운 신화를 꿈꾼다. 자본이 신이 되고 브랜드가 숭배의 대상이 되는 이 시대 위에 우뚝 서는 꿈이다. 하지만 신을 쫓는 가운데 인(人)을 품지 못하는 일이 없기를, 아직 판도라의 상자가 닫히지 않은 지금 바래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