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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2.06 15:06

간판 스케치 - 신사동 세로수길 사인1

  • 이광민 기자 | 237호 | 2012-02-06 | 조회수 4,485 Copy Link 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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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목 구석구석에서 만난 작은 예술
무조건 큰 간판은  No, 작지만 개성으로 어필한다


80년대 초 새마을운동의 일환으로 지금의 신사역과 압구정역 사이 수백 그루의 은행나무가 심어졌고, 30여년이 지난 지금, 늦가을이면 노란 물결이 장관을 이루는 이 은행나무 거리는 ‘가로수길’이라는 이름으로 많은 사람의 사랑을 받는 서울의 소호가 됐다.
한때는 화랑의 요람으로, 한때는 잘나가는 디자이너들의 성역과도 같았던 가로수길은, 이제는 젊은이의 동향을 선도하는 패션의 메카로 성장하기에 이르렀다. 가로수길의 유명세는 그 역사가 그리 멀지 않다. 트렌디한 옷가게와 액세서리용품점, 화장품 가게가 입점하고 드라마에서나 볼 법한 세련된 인테리어의 찻집 등이 점차 늘면서, 불과 3∼4년 사이 지금의 가로수길과 그 명성이 생겨난 것이다.
가로수길의 유명세에 가장 큰 수혜자는 다름 아닌 가로수 길을 끼고 도는 외진 골목길. 가로수길이 대형 커피전문점이나 의류, 화장품 가게 등으로 넘쳐나자, 개성 넘치는 소규모 카페나 숍들이 옆 골목으로 숨어들면서 ‘세로수길’이 만들어졌다. 세로수길은 기존의 가로수길과의 차별화된 콘셉트로 형성돼 또 하나의 신세대 로드맵으로 자리잡고 있는데, 이는 가로수길과 업종메뉴의 동선화를 피하고 그들만의 독특한 전략으로 새로운 길거리 문화를 설계하고 있는 것에 기인한다.
세로수길의 흥행은 단지 가로수길의 후광으로만 얻어진 벤치마킹로드 개념을 떠나 가로수길과는 확실히 구별되는 그들만의 노하우와 전략이 있다. 그 중 하나가 바로 간판 디자인. 멋스러운 무채색 코트와 두꺼운 점퍼, 은행 나뭇가지가 운치를 더한 겨울의 신사동 세로수길 간판을 담아봤다.   


간판디자인에서 독특한 인테리어와 자재사용으로 개성을 더했다. 녹슨 철판을 여백으로 사용했지만, 전혀 허름해 보이지 않고 오히려 부식된 철판의 질감이 상호 문구를 더욱 강조시키는 효과를 가져다준다. 비가 온 뒤, 녹과 먼지 자국이 생겨 지저분해지는 플렉스 사인의 단점은 여기선 장점이 된다. 먼지와 부식이 오히려 간판의 멋을 더하는 천연(?) 픽사티브 역할을 하기 때문. 부식 철을 이용한 간판은 이곳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아이템이다. 낡아서 오히려 세련된, 잘 만든 빈티지 청바지가 연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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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로수길과 세로수길은 같은 지역이지만 확실히 구분되어 인식되고 있다. 가로수길이 패션과 유행을 담은 거리라면, 세로수길은 다양한 종류의 맛집과 주점이 있어 그 경계가 뚜렷해지고 있다. 지하철 입구에 들어서면서부터 보이는 관광안내판에서도 이미 가로수길과 세로수길을 구분해 명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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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있는 간판도 눈에 띄었다. 간판의 방향과 외벽 색상의 특성을 이용해 채널사인의 그림자를 활용한 간판이다. 건물 전체가 해를 향하고 있어 낮에는 항상 햇빛에 노출돼 그림자가 생기고, 동판으로 제작된 고정발 채널과 벽 사이의 공간을 넉넉하게 띄어 입체적인 효과를 연출한다. 회색 티셔츠를 입고 땀을 흘리면 땀자국이 더욱 선명하듯, 회색 콘크리트에 투영된 그림자가 더욱 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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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완성의 뉘앙스를 주는 투박한 콘크리트 외벽이 이곳에선 훌륭한 간판이 된다. 콘크리트가 주는 독특한 차가움과 거친 질감 속에서, 작은 이니셜이 대조를 이루며 중후한 간판 연출을 가능케 한다. 노출 콘크리트에 스카시를 이용한 간판디자인은 가로수길 뿐만 아니라 세로수길에도 이미 보편화된 시공법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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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로수길의 간판 크기 역시 가로수길과 차별화했다. 대형간판은 거의 찾아볼 수 없고 작지만, 눈에 띄는 간판으로 미관상의 거부감도 없다. 간판은 꼭 소란스러울 필요가 없다. 내실을 갖췄다면 아무리 작은 간판도 큰 전달력이 있다. 입이 크다고 목소리 큰 게 아니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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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로수길과 세로수길은 거의 업체 포화상태에 이르렀지만 세로수길의 진화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다양한 종류의 맛집과 주점이 들어서는 등 가로수길과 연계한 아이템 상호보완시스템이 전략적으로 구축되는 구간도 있다. 주택의 리모델링을 통해 세로수길의 흥행에 동참하려는 사업자가 늘어나는 추세다. 현재에도 10여개의 리모델링 공사가 진행 중에 있고 더욱 그 범위가 늘어날 것으로 전망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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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로수길의 간판은 많은 내용이 적혀 있지 않다. 매장 대부분에서 내건 간판문구에는 상호 외에 어떠한 것도 담겨있지 않은 경우가 많다. 어렵게 찾아낸 pc방 역시 마찬가지. 어떠한 pc사양도 홍보하지 않고 ‘1시간 무료’라는 문구만 추가로 적혀 있다. 소규모라는 이유도 있지만, 위치를 찾기 어려운 만큼 굳이 시각적으로 소란스럽게 홍보할 필요가 없기 때문. 사실 세로수길에서 길을 잃는 건 전혀 이상하지 않다.




이광민 기자                [ⓒ SP투데이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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