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미디어로서의 디지털 사이니지 최근에는 디지털 사이니지를 단순한 광고 플랫폼이 아닌, 새로운 차원의 미디어로 이해하는 경향이 계속 확산되고 있다. 이전에 ‘전자간판’, ‘디지털간판’, ‘디지털영상 장치’, ‘Digital information display(DID)’ 등으로 디지털 사이니지를 이해하는 방식과 비교해 보면 이는 진일보한 흐름이라고 할 수 있다. ‘디지털 사이니지는 미디어다’라고 정의해도 개념적으로나 현실적으로 아무런 문제가 없다. 그러나 여기에서 멈춰버리면 조금은 부족한 느낌이 든다. 당연히 이런 질문이 따르게 된다. 디지털 사이니지도 하나의 미디어라면 기존의 미디어와 무슨 차별성이 있는가? 우선 미디어에 대해서 잠시 생각해 보자. 우리는 신문 방송과 같은 매스 미디어에 익숙해져 있다. 정보를 먼저 얻을 수 있는 기관이나 조직이 일방적으로 전달해주는 대량 정보의 수용에 오랜 기간 훈련돼 있기 때문에 미디어를 신문방송과 일치시켜 이해하는 경향이 지배적이다. 물론 이런 이해가 어느 정도 타당한 면이 있다. 그러나 미디어를 신문 방송에 국한시켜 이해한다면 미디어의 본질을 놓치게 된다. 기본적으로 미디어는 매개시스템이다. 정보 전달자와 정보 수용자를 연결하는 모든 종류의 인터페이스가 미디어다. 샤머니즘의 무당은 하늘의 뜻을 인간에게 전달하고 인간의 모든 원한을 하늘에 전달하는 미디어고, 붉은 저녁노을은 다음날 맑은 날씨를 알려주는 사인이고 미디어다.
5. 미디어의 두 분류 미디어가 정보를 매개한다면 정보의 속성에 따라 미디어는 달라질 수 있다. 모든 것이 미디어가 될 수 있기 때문에 중요한 것은 정보의 속성이다. 시공간과 연관시켜 정보의 속성을 분류하면 정보는 ‘시간의 흐름에 영향을 받는 정보’와 ‘물리적 공간과 연관성이 높은 정보’로 분류할 수 있다. 어제의 뉴스는 오늘의 뉴스가 아니다. 어제 TV로 전달된 정보를 오늘 다시 신문으로 받아 볼 이유가 없다. 뉴스 정보는 정보를 물리적으로 가장 빨리 전달할 수 있는 미디어를 선택해야 한다. 시간의 흐름과 관련성이 깊기 때문이다. 남보다 먼저 알고, 남보다 정확하게 안다는 것은 중요한 경쟁력이다. 따라서 이런 정보를 매개하는 미디어는 국제적 네트워크를 보유한 거대그룹이 운영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러나 ‘물리적 공간과 연관성이 높은 정보’는 정보와 연관된 공간에 대한 이해가 더 중요하다. 정보가 시간의 흐름을 알려주는 것이 아니라 공간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고 있기 때문이다. 상점 외부에 걸려있는 간판은 상점에 대한 정보를 제대로 전달해야 한다. 이 때 정보는 시간의 흐름과 관련이 없다. 공간에 대한 이해, 즉 공간의 물리적 구조와 그 물리적 구조가 만들어 내는 어떤 아우라에 대한 이해가 중요하다. 공간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간판을 만드는 것, 공간과 그 공간을 방문하는 사람을 위한 미디어를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 이것이 공간 미디어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다.
6. 공간 미디어에 대한 이해 르네상스시대, 바티칸의 시스티나성당 천정에는 미켈란젤로의 그림이 있다. 교황 율리우스2세로부터 성당 천정화를 그려달라고 부탁을 받은 미켈란젤로의 4년에 걸친 대작이다. 구약성경에 나와 있는 천지창조, 실락원, 노아의 방주 등을 그림으로 표현했다. 그러나 그림을 그려서 액자에 담아 전시하는 것이 아니라 건물의 물리적 구조를 그대로 활용한다. 성당 천장은 하나의 단일한 평면으로 구성되어 있지 않다. 수많은 면들로 나누어져 있고 각 면들은 연결돼 있기도 하지만 분리되어 있기도 하다. 어느 면은 평면이지만 다른 면은 곡면이기도 하다. 이곳에 그림을 그려야 하고 그 그림은 전체적인 통일성이 있어야 한다. 당시 민중은 라틴어로 쓰여진 성서를 해독할 능력이 없었다. 이제 공간 시스티나 성당이 있고, 표현해야 할 정보가 있고, 그 정보를 성당이라는 공간을 활용해 전달해야 할 의무가 생겼다. 미켈란젤로는 이 모든 요소를 고려해서 그림을 그렸고 그 그림은 당대 뿐 만이 아니라 후대에까지 강한 인상을 남기고 있다. 여기에서 그림은 하나의 미디어다. 그림을 통해, 미디어를 통해 미켈란젤로는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다. 요즘 식으로 표현하자면 정보를 전달하고 있다. 정보의 수용자가 천상의 신이든, 땅에 사는 인간이든 시스티나 성당의 천정화가 보여 주는 공간과 미디어의 환상적인 조합을 거부할 수는 없다. 공간미디어는 이렇게 공간과 미디어가 함께 정보를, 메시지를 전달해야 한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정보의 내용이 평가되는 ‘시간의 흐름에 영향을 받는 정보’와 달리 ‘물리적 공간과 연관성이 높은 정보’는 공간이라는 물리적 환경과 그 공간이 갖고 있는 사회적 맥락을 먼저 고려해야 한다. 맥락에 대한 고려 없이 전달하고자 하는 욕망만 드러나는 미디어는 미디어가 아니라 폭력이다.
7. 미디어 파사드 파사드(facade)는 라틴어에서 유래된 건축용어다. 얼굴(face)과 같은 어원을 갖고 있고 건물의 전면부를 통칭하는 의미로 사용되어 왔다. 중세 이전 건축물들은 단순 박스식인 현대의 건축물과 달리 그 자체가 하나의 완벽한 스토리를 갖고 있었다. 건축물은 하나의 인격체였으며 파사드는 건축물의 정면, 사람으로 비유하자면 얼굴에 해당하는 부분이다. 건축물 정면에 여러 입체적, 시각적 장치들이 배치되어 있어 파사드를 통해 건축물이 주는 메시지를 이해할 수 있었다. 이런 건축양식은 근대 자본주의 이후 도시로 인구가 급격히 유입되고 실용적인 건축양식들이 선호되면서 차츰 사라지게 된다. 미디어파사드는 한번 준공된 건축물에 물리적 훼손을 가할 필요 없이 디지털 테크놀로지를 활용해 건축물이 갖고 있는 메시지를 전달한다. 그러나 과거 파사드와 달리 미디어 파사드는 메시지를 정형화시키지 않는다. 파사드 위에 연출되는 디지털 콘텐츠를 통해 건축물이 갖고 있는 메시지를 스토리텔링 방식으로 전달한다. 미디어파사드를 통해 건축물은 자신의 이야기를 하게 되고 미디어 파사드는 이제 또 하나의 공간 미디어로서의 의미를 갖게 된다.
8. 공간의 재구성과 시장의 가능성 디지털 사이니지를 단순한 광고 플랫폼으로 이해하는 방식과 공간미디어로 수용하는 태도 사이에는 건널 수 없을 정도의 큰 간극이 있다. 광고 플랫폼으로 이해하는 경우 우선적으로 고려되는 것은 총투자비용과 그 투자금액을 회수할 수 있는 광고 수주 가능성이다. 공간에 대한 고려는 부차적이다. 공간에 대한 배려 없이 만들어진 광고플랫폼은 길거리나 상점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단순한 간판에 지나지 않는다. 대부분의 광고기획자들의 출발점이 경제적 요소들에 대한 고민이기 때문에 공간에 상관없이 그 결과물은 대체로 비슷하다. 보여주는 콘텐츠 역시 거의 대동소이하다. 디지털사이니지용 디스플레이가 계속 나타나고 있지만, 실제로 사람들의 관심을 유발하는 경우가 별로 없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디지털 사이니지를 공간 미디어로 수용하는 태도에는 공간과 메시지에 대한 사회적, 문화적 맥락에 대한 철학적 통찰이 전제돼 있다. 공간과 미디어가 함께 발언하면서 메시지 수용자에게 자연스럽게 정보를 제공한다. 그 정보가 무엇이던 간에 수용되는 과정이 자연스럽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시공간의 관계 속에서 호흡하기 때문에 공간 그 자체와 자신을 일치시키는 경향이 있다. 이런 면에서 공간 미디어는 인간의 본질에 대한 이해 그 자체라고도 볼 수 있다. 기본적으로 상품은 늘 새로워야 한다. 상품은 결국 인간의 사회적, 문화적 욕망의 반영이고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디지털 테크놀로지는 신상품을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공간을 재해석 하면서 상품의 개념을 변화시켰다. 네트워크를 통해 늘 타자와 접속하려는 욕망, 그러나 근대적 개인으로서의 자기정체성을 지키고 싶어하는 욕망, 그 둘 사이를 긴장 없이 또는 긴장을 최소화시키면서 디지털 사이니지는 계속 확장되고 있다. 디지털 사이니지를 광고 플랫폼으로 보는 시각은 일차원적 사고방식이다. 디지털 사이니지는 공간을 재구성함으로써 욕망을 새롭게 충족시켜 준다. 그리고 그 구체적 비즈니스 모델이 계속 나오고 있다. 중요한 것은 상품 그 자체가 아니다. 상품의 유통방식, 네트워크를 통해 흐르는 욕망의 유통 방식에 대한 사회학적·철학적 이해와 그러한 이해에 바탕을 둔 새로운 타입의 비즈니스 모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