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북 진안군 백운면(白雲面) 원촌리는 호랑이 담배 먹던 시절 고을 원님이 하룻밤 머물고 간 이후 '원촌마을'로 불린다. 오지의 대명사 무진장(茂鎭長·무주, 진안, 장수)과 임순남(임실, 순창, 남원)의 한 가운데 위치해 오지 중에서도 오지로 꼽히는 이마을은 조선말 고종황제 서거 소식을 일주일만에 들었다는 곳이다.
이런 오지마을이 간판 하나로 전국적 명성을 얻었다.
진안군 백운면 소재지 백운약방과 정류소, 농약사가 나란히 들어선 1층 슬라브 건물 지붕엔 '흰구름'이라 쓴 한글 간판이 푸른 하늘에 걸린 모양을 하고 있다. 농약사와 출입문이 터져있는 약방엔 오토바이, 경운기를 도로에 세운 70대 노인들이 연신 드나든다. 면소재지를 찾은 노인들은 딱히 볼일이 없어도 약방에 들러 세상소식을 접하곤 한다.
2007년 공공미술 프로젝트 사업이 진행된 원촌마을엔 이색 간판과 시골 정경을 사진에 담고 이야기를 들으려는 이들이 약방 앞에 성가실 정도로 몰리고 있다. 연수 프로그램 참여자들과 인근 관광지를 방문했던 이들이 빼놓으면 서운한 코스로 여겨 연간 3천명~4천명이 이곳을 찾고 있다.
진안군, 원촌마을 주민자치위원회, 전주대 'X-edu사업단' 미대 교수들이 사업비 2천600만원(전주대 1천만원, 진안군 1천만원, 추가 600만원)을 들여 시작했던 사업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결과를 낳았다.
평생 원촌리에서 살았다는 백운약방 주인 장훈식(75)씨는 "우리가 볼때 별것 아닌데 전국에서 간판을 보려는 사람들이 몰려온다"며 "기성세대들은 젊은 시절 시골 향수를 떠올리며 감회에 젖고, 젊은세대들도 이색적인 풍경에 재미있어 한다"고 말했다.
경운기·자동차 타이어, 고장난 이앙기, 산소통 등 오만잡동사니가 앞마당에 널부러져 있는 백운 농기계수리센터는 흰색 박스형 기둥간판이 자리잡고 있다.
낮은 지붕의 슬레이트 건물 앞에 놓인 간판은 농기계수리센터 잡동사니들과 어색한 조화를 이룬다. 백운면을 찾는 이들은 말쏙하게 정돈된 여느 수리센터와 전혀 다른 풍경에 셔터를 연신 터뜨리곤 한다.
25년째 백운농기계수리센터를 운영하는 양남용(58)씨는 전주대 사업단이 자신의 구상을 귀담아 들어준 것을 고마워 했다.
양씨는 "처음엔 반발도 있었지만, 전주대 팀이 여러차례 방문해 아이디어를 제시하고 상인들 의견을 들었다"며 "간판을 세운다면 '이렇게 해야지' 했던 생각을 말했더니 대부분 반영했다"고 말했다.
양씨는 "농기계수리센터에 입간판이 어울릴까 싶었는데 보기 좋았고, 방문객들도 흥미롭게 여겨 카메라에 담아가곤 한다"며 "공무원들이나 연수생들에게 간판사업을 보고 더 좋은 아이템을 만들어 보라고 귀띔을 한다"고 말했다.
옛 장터에 자리잡은 '육번집' 간판은 해물과 야채 등 식재료 밑그림에 주인 김재순(72)씨 남편 전영수(72)씨가 글을 쓴 것이다. 소머리 국밥, 돼지국밥, 콩나물 국밥, 백반이 주메뉴인 '육번집'은 옛날에 쓰던 수동식 전화 번호 '6번'을 상호로 사용했다.
원촌마을에 시집와 40년째 식당을 하고 있는 김재순씨는 "식당 손님도 부쩍 늘어 좋은데 단체가 몰려오면 방이 좁아 감당을 못한다"며 "사진만 찍고 가는 사람들도 많다"고 말했다.
면 소재지 뒷길 희망건강원은 염소가 슬레이트 지붕에 올라가 있다. 검은색 염소 머리 앞에 노란 모양은 호박을 말한다. 이곳이 건강원임을 표현한 것이다.
풍년 떡 방앗간 간판은 나락을 잎에 문 새가 들판을 날으는 모습이다. 밑그림 위에 쓴 '풍년 떡 방앗간'은 사장이자 마을 이장 전진기(59)씨가 직접 썼다.
마을이장 전씨는 "시골상가여서 간판이 없는 업소가 3분의 1이 넘었고, 간판을 달아 본들 무슨 효과가 있겠냐는 시각이 있었다"며 "컨설팅하는 분들이 부담가는 게 아니다며 꾸준히 설득을 했고, 주민들은 3개월간 10여 차례 회의를 거쳐 제작에 직접 참여하는 방식으로 진행했다"고 설명했다.
전씨는 "주민들이 경제적인 효과를 거둔 것 아니지만, 방문객들이 많다보니 '새로운 것을 시도해 봐야 겠구나'라는 새로운 눈을 뜨게 된 게 가장 큰 성과"라고 강조했다.
오지마을에 '문화'가 입혀져 '전국적 모범사례'라는 소리를 듣게 되자 주민들이 달라졌다. 자긍심과 자신감이 생겨 간판사업과 같은 제2, 제3의 사업의 연결됐다.
주민자치위원회는 '마을 조사단'을 꾸려 문화자원을 발굴했다. 옛 풍경을 담은 사진을 찾아 '백운면 옛날 사진 전시회'를 열어 공동체 의식 회복에 나섰다.
백운면 9개 마을 축제 복원 사업도 추진해 지난해 8월에는 옛 장터에서 가설극장을 열었다. 돌아오지 않는 해병, 별들의 고향, 소나기 같은 영화를 돌려 60대에서 70~80대가 대부분인 농촌주민들은 흘러간 옛 영화 덕에 젊은시절 '전성기'를 떠올렸다.
주민자치위원회는 간판사업에서 탄력을 받아 2009년 '흰 구름' 작은 도서관을 개설했다. 중앙국립도서관 공모사업에 공모해 1억4천만원의 사업비를 지원 받았다.
옛 보건지소 건물 312㎡(94평)을 도서실과 정보화 교실, 사랑방, 체험관, 사무실로 꾸렸다. 컴퓨터 8대와 5천권의 도서를 확보해 2009년 완공된 도서관에는 수업을 마친 초·중학생들의 문화공간으로 자리 잡았다.
김건우(백운초 6년) 어린이는 "학교수업을 마친 후 들렸다 집으로 향한다"며 "과외 선생님이 집에 오기전까지 책을 읽거나, 컴퓨터를 한다"고 말했다.
주민자치위원회는 농촌마을 경관개선사업 공모에도 선정됐다.
올초에는 농림축산식품부가 주관하는 '소재지권 정비사업'에 공모했다. 주민들은 3년간 70억원의 예산이 지원되는 사업이 추진될 경우 마을이 또 한차례 변화할 것이라는 기대감에 부풀어 있다.
원촌마을 이장 전진기씨는 "간판사업을 시작으로 우리 마을에 많은 활력이 생겼다"며 "가장 큰 성과는 주민들과 마을 리더들이 뜻을 모으면 얼마든 새롭게 가꿀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게 된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