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점수·실적 감소 등으로 투자 줄여 제작업계, 갈수록 줄어드는 일감과 마진에 ‘한숨’ 마른 행주 쥐어짜내기식 입찰-제작업계 출혈경쟁 ‘심각’
‘은행 간판, 이제 예전 같지 않네요’ 갈수록 보유지점수가 줄어들고 영업실적이 감소하고 있는 금융업계 불경기의 여파가 제작업계에도 불어닥치고 있다. 그동안 은행의 협력업체로 일해오던 제작업계의 간판 교체·관리 수주액 감소가 현실화되면서 여기저기서 한숨소리가 이어져 나오고 있다.
▲은행 규모 축소 이어져 E은행만 하더라도 원래 990여개였던 영업점이 최근 900개로 줄어들었다. 이것도 사실상 표면적인 숫자에 불과하다. 900여개 지점 가운데 100여 군데는 자동화코너로 바뀌어 실질적인 점포수는 더 많이 줄었다고 봐야한다. 불과 5~6년 만의 일이다. 한 제작업계 관계자는 “모바일이나 인터넷 뱅킹의 이용빈도가 높아지는 것도 그 이유지만 무엇보다 적자로 인한 축소가 대부분”이라며 “점포들 가운데 일부는 무인 코너로 바뀌는 경우도 있어 실제로 은행의 규모가 더욱 축소되고 있는 실정”이라고 전했다. E은행 뿐 아니라 대부분의 시중은행들의 지점수가 전반적으로 줄어들고 있는 추세다. 시중·지방은행 13곳의 2015년 최근 사업보고서에 따르면 지난해 말 개별 은행들이 국내에서 운영하는 본점과 지점, 영업소, 사무소는 총 5,890곳. 2014년도에 6,055곳으로 집계된 것을 보면, 국내은행 지점이 1년 만에 160곳 이상 감소한 것이다. 그러니 간판 교체를 필두로 한 매장 리뉴얼이나 유지 관리 등의 빈도가 줄어들고 더불어 투입하는 비용도 자연스럽게 감소하고 있는 것. 그러다보니 은행의 간판 관리 협력업체로 등록되어 활동하더라도 재미가 없다는 게 업계의 중론이다. 제작업체 D사 관계자는 “예전에는 내부사인물만 교체해도 물량이 점포 하나에 1,000만원 어치가 나왔다면 지금은 몇십만원 짜리 하나 드물게 나오는데 막상 공사전에 현장 실측하러 가고 설치할 때 재방문 하면서 드는 출장비용도 회수 못하는 수준”이라며 “정말 몇 만원 남기기 위해 가는 경우가 허다하다”고 설명했다.
▲아낌없는 투자는 ‘옛 말’ 제작업계로서는 현재 상황에 격세지감을 느낄 수 밖에 없다. 과거 간판 입찰 수주전에서 은행일을 따내면 콧노래가 절로 나오던 때가 있었다. 주변 업체들의 부러움을 절로 살 정도였다. 지점 보유수에 따라 차이는 있지만 적게는 수십억원에서 많게는 수 백 억원대의 간판 교체 물량이 나오던 곳이 바로 ‘은행 간판’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대대적인 리뉴얼에 국한돼 있는 경우이긴 하지만, 한번의 리뉴얼이 끝나도 그 뒤에 지속적인 유지보수와 관리가 이어지기 때문에 협력업체 입장에서는 몇년치 먹거리를 안정적으로 확보하게 되는 셈이다. 예를 들어 5~6개 업체가 1,000여개 지점을 확보한 은행의 간판 관리를 맡게 되면 한 업체당 적어도 150개 지점을 도맡게 된다. 그러면 협력사를 새로 뽑는 다음 입찰이 있기 전까지 적어도 3~4년, 길게는 10년 이상까지도 은행 간판 교체 및 관리를 맡게 되는 것. 다른 일에 비해 비교적 장기적으로 안정적인 수익을 보장받는 통로였던 셈이다. 이는 대리점 수가 많은 이동통신사나 유명 프랜차이즈도 마찬가지이긴 하지만, 은행의 경우 타 업종에 비해서 점포의 이미지 관리에 까다로운 만큼 투자비용을 아끼지 않았다. 플렉스 간판 하나 다는데 1,000만원을 호가할 정도였다. 백만원 초반대로 단가가 떨어진 지금은 상상도 못할 금액이다.
▲은행들의 남달랐던 간판 관리 당시 은행들은 눈에 잘 띄는 간판 하나가 100명의 영업사원 부럽지 않은 몫을 한다고 여겼다. 그래서 은행 간판들은 여느 간판보다 컸다. 경쟁 은행보다 눈에 잘 띄기를 원했던 것이다. 법령의 변화로 지금은 사라져 버린 커다란 지주간판도 은행 간판의 상징중 하나였다. 붙어있는 나방 한 마리 안보일 정도로 ‘청결한 간판’ 또한 은행 간판의 트레이드마크였다. 깨끗한 이미지 관리는 은행이 주는 신뢰감을 유지하기 위한 방편이었다. 무엇보다 첩보작전을 방불케 하는 대대적인 간판 리뉴얼 작업 또한 은행 간판만이 가지고 있던 전통이었다. 새로운 CI 선포식이 있기 전에 전국 모든 지점의 간판 교체 작업을 일제히 완료한 후 천으로 가려놓고 신규 CI 선포식이 끝나면 전국에 산재되어 있는 수백군데 이상의 은행 영업점들이 동시에 새로운 간판을 공개하는 방식이다. 마치 은행 간판은 이렇게 바꿔야 한다는 관례처럼 자리잡았던 것이다. 은행들이 ‘간판을 얼마나 중히 여겼는지’ 보여지는 대목이다. 간판 리뉴얼 뿐 아니라 평상시에도 간판에 대한 관리가 철저하게 이어졌다. 제작업체 P사 관계자는 “간판에 조그마한 얼룩이 생겼거나 형광등 하나 나가도 야심한 시각에도 즉시 출동해야 했다”며 “언뜻 갑질처럼 들릴 수도 있겠지만 야간 작업에 대한 충분한 비용을 지불받았기 때문에 업체들은 그런 일에도 기꺼이 응했다”고 회상했다. 아무리 먼 지방이라도 어둠을 뚫고 달려가야 했다. 은행 간판들이 늘 청결함을 유지할 수 있었던 이유다. 하지만 작금의 은행 간판들을 보면 ‘다리미로 막 다려놓은 구김하나 없는 와이셔츠’ 같은 이미지가 사라진지 오래다. 한 업계 관계자는 “요즘은 글자 하나 불이 나가 있어도 신경 안쓰는 분위기”라며 “어떤 은행 지점들은 간판 먼지와 얼룩으로 지저분해 보이는데도 그냥 놔둔다”고 전했다. 과거와 달리 유지보수에 신경을 많이 쓰지 않는다는 것. 그런가하면 최근에는 새 간판을 ‘전국 동시다발’로 선보였던 관례도 무너지고 있다. 최근 합병을 통해 간판을 바꿔단 T은행은 전국 지점의 간판들을 점진적으로 바꿔나가고 있어 지점마다 다른 간판이 보인다.
▲전자입찰 도입·법령 개정이 ‘독약’ 어쩌면 이같은 금융권 간판의 퇴조는 예견되어 있었는지도 모른다. ‘꽃 중의 꽃’으로 불리던 은행 간판 시장의 분위기가 달라지게 된 계기가 2000년대 이후 있었다. 그 시발점은 전자입찰의 도입이었다. 전자입찰의 도입으로 현장에서 가격을 써내던 입찰에서 탈피, 입찰 담당자들은 컴퓨터를 보고 응찰했다. 문제는 전자입찰의 도입으로 역경매 방식의 간판 입찰이 주를 이뤄 최저가 입찰이 정착하게 됐는데, 이로인해 공사 마진이 점차 줄어들기 시작했다. 이후 간판 크기와 재질에 대한 규제가 본격화된 2007년, ‘서울시 옥외광고물 가이드라인’ 고시로 인해 은행들은 점차 법령에 맞는 간판으로 바꿔달기 시작했는데 그 후폭풍은 업계에 치명타를 입혔다. 제작업체 J사 관계자는 “입체형 간판이라 불리는 채널사인이나 면발광사인들이 사실 만들기도 까다로운데 발주처들은 간판의 크기가 줄어든 만큼 단가도 줄여나가는 단순 계산으로 터무니없는 단가를 부르기 시작했다”며 “이같은 상황에서 업계 간 출혈경쟁도 심각해졌다”고 전했다. 발주처인 은행들의 쥐어짜내기식 입찰도 문제지만, 말도 안되는 단가에 뛰어드는 업계의 출혈 경쟁 행태에도 문제가 많다는 게 업계의 중론이다. 한 제작업체 관계자는 “과거의 금융권 간판 이미지가 있어 그런지 여전히 신흥 업체들은 이 시장에 진입하고 싶어한다”며 “모르니까 무식한건지 답도 안나오는 단가에 치고 들어와 공사를 따내가는 경우가 있다”고 설명했다. 문제는 이같은 신흥업체들의 경우 무책임하게 공사를 수주해 하청업체에 일을 맡겨놓고 ‘먹튀’하는 경우도 있어 이에 대한 부담은 고스란히 하청업체에 넘어가는 경우가 많다는 것. 금융권 간판의 퇴조를 더욱 부추겨 정직하게 일하고 있는 제작업계에 피해를 주고 있다. 과거 ‘꽃 중의 꽃’이라 불리우던 금융권 간판의 쇄락을 막을 열쇠는 어쩌면 제작업계가 쥐고 있는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