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인’을 주제로 2주간 유럽을 탐방한 당찬 여대생들이 있어 화제다. 화제의 주인공은 서울여대 시각디자인과 3학년에 재학 중인 정주리(22), 허고운(21), 심보경(22)양. 이들은 대학생 대상 해외탐방 프로그램인 ‘2003 LG글로벌 챌린저(http://challenger.lg.co.kr)’에 ‘사인’을 주제로 출사표를 던져 23대 1의 치열한 경쟁률을 뚫고 지난 7월 21일부터 2주 일정으로 독일, 네덜란드, 파리의 공공 사인물을 탐방하고 돌아왔다.
이들이 택한 주제는 ‘way finding(길찾기)을 위한 사인의 디자인적 접근’. “주제를 잡기 위해 한달 가까이 도서관으로 등하교하면서 디자인관련 서적을 뒤졌습니다. 대구 지하철 참사를 통해 공공사인의 중요성이 부각됐다는 점과 우리나라의 사인문화가 상당히 열악하다는 점을 모티브로 ‘사인’을 큰 주제로 잡고, 효율적인 사인시스템을 갖춘 공항을 중심으로 유럽의 공공사인을 탐방하기로 결정했습니다.”
■ 스키폴 공항에서 프랑스 지하철까지
이들의 첫 탐방대상은 물류 거점지로 세계적이고 체계적인 사인 시스템을 갖춘 네덜란드의 대표적인 국제공항인 스키폴 공항. 정주리 양은 “비비드한 노란색과 검정, 픽토그램을 적절히 활용한 주목도가 뛰어난 사인물들이 인상적이었다”며 “가시거리를 고려해 사인물의 위치 선정에 신경을 쓴 흔적들을 여기저기서 볼 수 있었다”고 설명했다. 네덜란드를 거쳐 이들이 두 번째로 택한 나라는 독일. 이들은 독일의 뒤셀도르프 공항과 프랑크푸르트 공항 그리고 체계적인 시스템으로 유명한 독일의 대중교통을 훑어봤다. 이들은 뒤셀도르프 공항이 화재 사건 이후 안전을 고려한 체계적인 사인 시스템을 구축한 곳이기 때문에 사고에 대한 대책이 필요한 우리나라의 공공시설물에 좋은 모델이 될 것이라고 입을 모았다. 마지막 목적지인 프랑스에서는 파리의 대중교통을 총괄, 관리하는 기관인 ‘RATP’의 담당자와 직접 인터뷰하기도 했다. 세 학생 모두 인터뷰를 통해 느낀 것이 많다고 한다. 허고운 양은 “RATP는 5년전 전체 교통수단 간의 연결을 위한 네트워크 형성 프로젝트를 실시해 대중교통 수단 간의 연결성과 이용편의성을 고려한 대중교통체계를 구축했다”며 “인터뷰에 응해 주었던 담당자가 한 말 중 ‘사인은 인간과의 커뮤니케이션’이라는 말은 사인의 기본, 나아가 모든 디자인의 기본을 생각하게끔 했다”고 들려줬다. 심보경 양도 “RATP의 체계화된 대중교통 시스템을 통해 효과적인 정보 전달과 인간을 위한 디자인 두 가지를 만족시키는 사인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게 됐다”고 말했다. 이들이 한결같이 입을 모으는 유럽 공공사인의 특징은 색상과 서체, 픽토그램을 적절히 활용한 효율적인 사인시스템을 구축하고 있다는 점.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명확하고 간단한 사인 시스템을 구축하기 위해 색상과 서체의 조화를 가장 염두에 두고 있었습니다. 우리나라와 달리 다양한 픽토그램이 사인에 적용되고 있는 점이 독특하면서도 눈에 띄었습니다.”
■ 유럽사인 2000장 사진에 담아
이들은 유럽의 공공 사인을 직접 보고 그 생생한 현장을 카메라에 담아왔다. 찍은 사진만도 무려 2000여장에 달한다. 사상 유례없는 폭염, 빡빡한 일정으로 녹록치 않은 2주간의 여정이었지만 어느 누구도 이들의 열정과 학구열을 막을 수는 없었다. 무거운 가방과 캠코더, 노트북을 들고 이리 저리 뛰어다니느라 녹초가 된 몸을 이끌고 숙소에 들어와 찍은 사진들을 정리하고 그날그날의 탐방기를 인터넷 중계하는 욕심까지 부려 새벽녘이 다 돼서야 잠자리에 들기 일쑤였다. 욕심많은 이들 3인방은 조금이라도 더 많은 자료를 담아내기 위해 쉴새 없이 셔터를 눌러댔다. 주제가 주제인지라 공항 화장실부터 지하철 안에서나 버스 안에서나 카메라를 손에서 놓지 않았다.그래서 사진을 찍으면서 생긴 에피소드만도 한 보따리란다. 공항 화장실에서 사진을 찍다가 이상한 사람 취급받은 일부터 파리 지하철 픽토그램을 촬영하다 노숙자사진 찍는 것으로 오해받아 난감했던 일, 독일의 교통사인을 알아보기 위해 버스를 타고 길을 잘못 들어 헤맨 일 등등 ‘사인’을 향한 3인방의 집념은 수많은 뒷얘기를 남겼다.
■ “사인시스템에 대한 인식전환 필요”
6개월 간 ‘사인’을 갖고 씨름하다 보니 이들 3인방도 어느새 사인에 관한한 준 전문가가 다 됐다. 이번 탐방을 통해 느낀 점을 한마디씩 해달라는 기자의 주문에 우리나라 사인문화의 문제점과 개선점을 요목조목 짚어내는 당찬 모습을 보일 정도. 심보경 학생은 “사인이 무질서하게 범람하는 현실 속에서 정보제공 및 길잡이 역할을 해야 하는 공공사인조차 제 역할을 다 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라며 “효과적이고 편리한 정보디자인, 보기 좋고 아름다운 거리를 만들기 위해 사인시스템에 대한 연구가 절실하다”고 강조했다. 정주리 학생은 “건축물의 설계 단계부터 사인시스템의 기획도 함께 이뤄져야 한다”며 “건축물과 주변환경과의 조화를 고려한 체계적이고 효율적인 사인시스템을 구축해가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허고운 학생은 “국가 이미지를 반영한 스키폴 공항의 노란색 사인, 도시환경과의 조화를 고려한 독일의 도로교통 표지판, 안전을 최우선한 독일의 뒤셀도르프 공항 등 벤치마킹할 사례가 상당히 많다”고 들려줬다.
이들의 사인탐방기는 2주간의 유럽여행으로 끝난 게 아니었다. 방대한 양의 사진 자료를 정리하고 이를 보고서로 작성해 제출해야 하는 숙제가 남아있는 것. “3월부터 지금껏 ‘사인’을 머리와 입에 달고 다녔어요. 이제 남은 건 그간의 과정을 일목요연하게, 그리고 체계적으로 정리하는 일이에요. 저희 스스로도 찍어온 사진과 방대한 자료에 놀랄 정도예요. 멋지게 보고서를 작성해서 유종의 미를 거두고 싶어요.” 이번 탐방이 지금까지의 대학생활 중 가장 잊지 못할 기억이 될 거라고 입을 모으는 이들 3인방. ‘사인’은 이들에게 평생 잊지 못할 가슴 속의 ‘사인’으로 남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