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희 기자 | 150호 | 2008-06-10 | 조회수 3,2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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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 가이드라인, 간판교체 가로막고 불법간판 조장 사례 많아 광고주들 눈치보며 교체 ‘차일피일’… 업계는 때아닌 된서리에 몸살
간판을 개선하려는 목적으로 정부와 지자체들이 추진하고 있는 규제 강화 정책이 거꾸로 간판의 개악을 초래하는 역기능을 낳고 있다. 간판업계나 점포주인 광고주는 물론이고 일선 시군구 담당공무원에 이르기까지 이해당사자들의 전방위적인 반대 여론에도 불구하고 시 전역에 고시가 강행된 서울시의 경우 광고물 가이드라인이 당초 취지와 정반대로 간판 문화 개선의 걸림돌로 작용하는 사례가 속출하고 있다. 도시미관을 향상시키고 정체성있는 도시로 탈바꿈하기 위해 간판 문화를 개선하겠다는 서울시의 강력한 의지가 무색할 만큼 오히려 교체되고 개선돼야 할 간판을 그대로 방치하게 만드는 부작용이 초래되고 있는 것.
기업체들의 간판 업무를 맡는 마케팅부서 담당자들에 따르면 정부 및 지자체의 지나친 규제가 간판개선 작업을 하는데 방해요소가 되고 있다. 일례로 대표적인 규제 강화책으로 꼽히는 서울시 가이드라인의 경우 간판교체 계획을 세웠던 다수의 업체들로 하여금 실행을 포기하게 만들거나, 혹은 눈치를 보며 차일피일 미루는 요인이 되고 있다. 또한 제작업자들에게 인허가상의 어려움을 배가시키고, 광고주들에게는 표현의 자유를 극도로 제약함으로써 이들로 하여금 가이드라인을 아예 무시하고 불법간판을 달아버리도록 만드는 한 요인이 되고 있다. 한편으로는 도시 경관을 해치는 직접적인 원인이 되기도 한다. 가이드라인을 적용해 새로 간판을 달 경우 간판에 가려져 있던 노후화된 벽체나 훼손된 부분이 그대로 드러나기 때문에 건물을 단장하고 흉허물을 가려주는 순기능이 없어지기 때문이다.
■ 기업들 간판 교체 계획 잇따라 보류 간판에 대한 강력한 규제로 최근들어 기업들의 간판교체 심리는 ‘꽁꽁’ 얼어붙고 있다. 지금 교체를 감행할 경우 당장 간판의 크기나 수량이 축소되기 때문에 섣불리 손대지 못하고 있는 것. 일단 잠정적으로 보류하거나 아예 손을 놓아버리는 사례가 빈번히 발생하고 있다. 일부 기업과 제작업계에 따르면 J화재, G화재, L화재 등 보험업계는 올해 초부터 CI 변경에 따른 간판 교체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그러나 지난 4월부터 서울시 가이드라인이 시 전역을 대상으로 적용되기 시작하자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가이드라인 고시 전에 간판 교체를 계획했던 한 기업체의 마케팅 담당자는 “크기나 수량 등 기준 잡기가 갑자기 어려워졌다”면서 “서울시 가이드라인이 앞으로 어떻게 바뀔지도 모르겠다”고 계획 추진상의 어려움을 토로했다.
곧 CI 리모델링을 진행할 예정인 E은행도 역시 가이드라인에 따라 당초 계획에 없던 수정을 거듭하는 바람에 교체 일정이 계속 늦춰지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연초에 간판 교체를 계획했던 대부분 기업이 이와 같은 상황에 직면하면서 교체 시기를 미루거나 아예 손을 놓고 있는 상태다. 그런가 하면 당장 간판 교체가 시작됐음에도 불구하고 진행 속도 자체가 더딘 경우도 있다. 외식업 프랜차이즈 P사는 올 봄 CI 변경에 따른 매장 리모델링을 시작했으나 사실상 손도 못대고 있는 상황이다. 프랜차이즈를 운영하고 있는 개별 점포주들이 간판을 현 가이드라인대로 바꿀 수 없다며 강력 반대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가이드라인에 따라 교체를 준비중인 점포주들의 경우 작아지는 간판의 기능을 보완할 수 있는 익스테리어와 같은 여러 대안을 검토하거나 요구하고 있기 때문에 교체 속도는 더뎌질 수밖에 없다. 자재유통업체 대광커넥션의 김병삼 실장은 “요즘의 기업 간판물량은 과거와는 현저히 다르다”며 “과거처럼 일괄적인 교체·진행이 어렵기 때문에 더딘 속도로 진행돼 물량도 조금씩 빠져나가는 실정”이라고 전했다. 이는 비단 기업간판 뿐 아니라 생활형 간판에까지도 이어지고 있어 간판업계는 때아닌 된서리를 맞고 있다.
■ 불법광고물 양산하는 부작용도 규제 일변도의 가이드라인은 불법광고물을 양산하는 심각한 폐해를 초래하기도 한다. 불법을 차단하는 역할을 해야 하는 가이드라인이 오히려 이를 조장하는 원인으로 작용하고 있는 것. 특히 지자체마다 다른 기준과 절차 등 행정상의 불편은 제작업계에 영업적인 손해를 끼침으로써 행정절차를 기피하도록 만들고, 결국은 불법을 선택하게 하는 구실이 되고 있다. 예일토탈싸인 진홍근 상무는 “해당 지역에 적합하게 시안을 제작해도 허가를 받지 못하는 경우가 빈번하다”고 전했다. 동부크레인 김성학 대표는 “적법한 절차를 거쳐서 간판을 설치하는 제작자들은 시간 낭비는 물론이고 때로는 고객을 놓치기도 해 금전적 손해가 적지 않다”고 말했다.
K구 관계자는 “강화된 규제 때문에 허가 업무가 많이 밀린다”며 “가이드라인을 제대로 실현시키기 위해서는 이를 감당할 수 있는 행정인력도 뒷받침돼야 한다”고 말했다. 제작업체 뿐 아니라 광고주 역시 차라리 불법광고물을 택하는 게 낫다는 입장이다. 광고주 입장에서는 간판이 곧 생계와 직결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표현의 제약이 너무 심하다 보니 당장 영업적인 손해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법을 지키려고 했던 광고주나 제작업체들 다수가 불법광고물로 방향을 선회하고 있다는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 흉한 부분 가려주는 건물단장 기능 사라져 그러나 더 큰 문제는 가이드라인대로 간판을 교체했을 때 발생한다. 간판의 크기가 기존에 비해 터무니없이 축소되는 바람에 건물의 낡거나 훼손된 부분이 여실히 드러나 오히려 흉물스러운 모양새가 되기 때문이다. 간판 교체시 건물 리모델링이 수반되지 않으면 되려 지저분해지는 상황이다. 그러나 만만치 않은 교체 비용에다가 건물 리모델링비까지 부담할 수 있는 광고주들은 그리 많지 않다. 게다가 크기나 색상 등 표현의 제약이 심해 디자인에 대한 기대도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제한된 수량과 규격 등 가이드라인 안에서 최대한 크게 표출하려고 하다보니 대부분 간판이 서로 닮아버리는 웃지못할 결과를 초래하기도 한다. 이를 두고 한 광고물심의위원은 “공산국가가 따로 없다”고 한탄했다.
■ 보완 아닌 전면 재검토 이뤄져야 한편, 이같이 가이드라인의 부작용과 역작용이 속출하면서 업계와 광고주는 물론 일선 공무원들은 가이드라인에 대한 전면적인 재검토가 시급하다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광고주들은 대체로 도시미관을 살리자는 취지에 대해서는 공감하나 현실에 맞지 않은 면이 많아 수정이 필요하다는 입장이다. 르노삼성 마케팅팀 한 관계자는 “도시미관을 업그레이드시킨다는 취지에는 동감하지만 고시 내용이 디자인을 저해하는 요소가 많다”고 지적했다. 우리은행 홍보팀 한호 과장은 “기업의 입장에서 간판은 브랜드 이미지와 영업을 위한 아주 중요한 요소”라며 “규제일변도에서 벗어나 현실에 맞게 완화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광고주협회 한 관계자는 “현 가이드라인대로 간판을 적용할 경우 어떤 모습이 될지 시뮬레이션을 통해 재검토해 볼 필요가 있다”고 전했다. CI 디자인회사 손디자인의 손근민 실장은 “이번 가이드라인은 중간과정이 없는 너무 급진적인 변화”라며 “디자인, 제작사, 광고주 등 각계 관계자들의 의견을 수렴해 보완이 이뤄져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들에 비해 서울시 가이드라인으로부터 보다 강력한 직격탄을 맞고 있는 제작업계나 공무원들은 수정·보완이 아니라 전면 재검토가 이뤄져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