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넓은 문 있는데 왜 좁은 문 설치하나
비상문의 열리는 방식과 열림폭은 시민 안전과 직결된 가장 중요한 사양이다. 방식은 앞으로 밀려나와 열리는 접이식 방식과 옆으로 밀려서 열리는 슬라이딩 방식 두 가지가 있다. 이번에 설치가 추진되는 민자 21개 역사를 제외한 서울의 대부분 지하철 역사에는 접이식이 설치돼 있다. 반면 대구 지하철에는 비상문 전문 제작업체 N사의 열림폭 1,200㎜짜리 슬라이딩 방식 비상문이 설치돼 있다. N사 비상문은 특허 제품으로 대구교통공사는 설치때 N사와 협약을 체결, 사업을 진행했다.
2021년 감사원이 21개 역사의 광고판 부착 고정문이 비상문으로 교체되지 않은 점을 지적하자 공사는 교체 설치를 추진했고 서울시는 시예산으로 사업비를 지원했다.
공사는 이전에 접이식을 설치했던 것과 달리 탈출 공간과 열림폭 기능이 훨씬 우월한 슬라이딩 방식의 비상문을 설치하기로 했다.
공사는 입찰을 진행하기 위해 2호선 이대입구역에 시범 설치를 했다. 이 때 N사는 낙찰업체 T사로부터 하청을 받아 자사 제품을 설치했다. 당초 열림폭 1,200㎜짜리 제품을 설치하려 했는데 공사가 부적합 판정을 내리고는 200㎜ 확대를 요청했고 N사는 요청에 맞춰 1,400㎜ 제품을 새로 개발, 설치했다.
N사는 이 과정에서 공사 관계자들이 시범설치는 본공사 설치를 전제로 하는 것이기 때문에 본공사때 낙찰업체에 잘 얘기해서 N사 제품이 설치될 수 있도록 적극 도와주겠다고 했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공사가 요구하는대로 비용과 노력을 투자해 새 제품을 개발했고 관련된 모든 자료도 제공했다고 한다.
그런데 본공사 낙찰사인 H사는 N사 제품 대신 다른 업체 제품을 채택했다. 공사는 H사가 채택한 제품의 열림폭이 N사 제품보다 200㎜ 좁다고 밝혔다.
비상문의 가장 중요한 기능인 열림폭이 훨씬 넓은 제품이 배제되고 좁은 제품이 설치돼 그 만큼 시민의 안전에 취약점이 생기게 된 것이다.
2 가로형 패닉바 대신 왜 세로형 설치하나
시민의 안전 측면에서 비상문의 가장 중요한 사양중 또다른 하나가 문을 열기 위해 손으로 눌러 작동시키는 장치인 패닉바다. 비상시 전동차의 정차 위치가 제각각일 수 있기 때문에 패닉바는 문짝 전체를 커버하는 가로형이 절대적으로 유용하다. 기존에 설치돼 있는 서울 지하철 모든 역사, 모든 비상문의 패닉바가 모두 가로형인 이유다. 여는 방법이 적혀 있는 가로형 패닉바가 차내에서 눈에 잘 띄기 때문에 시민들에게 이미 익숙해진 상태다.
그런데 21개 역사 비상문의 패닉바는 가로형이 아닌 세로형으로 설치될 예정이다.
가로형 패닉바가 설치되지 않는 이유는 N사 특허의 핵심이 바로 이 가로형 패닉바이기 때문이다. 공사와 계약업체 H사가 N사의 특허 침해를 피하기 위해 서울 전체 역사와 다르게 21개 역사에만 기능이 떨어지는 세로형 패닉바를 설치하려 하지 않나 의문이 생기는 부분이다.
3 하자보증 이견 조율에 6개월이나 걸렸다?
21개 역사중 나중에 추가된 4개를 제외한 17개 역사의 비상문 납품 기한은 2023년 12월 29일이다. 그러나 이 기한에 단 한 개의 비상문도 납품되지 않았다. 공사가 제시한 입찰조건 및 계약사항이 지켜지지 않은 것이다. 그럼에도 공사는 납품 기한을 원래 사업기간의 절반인 6개월이나 연장해줬다.
공사가 제시하는 연장의 사유는 제품의 하자를 둘러싼 기존 광고판 광고업체 Y사와 계약업체 H사간에 발생한 ‘이견’ 때문이다. 이견 발생에 따른 법적 검토(법률 자문)와 추진방안을 판단하느라 6개월 동안 사업이 중단됐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억지 핑계에 불과하다. 이견을 조율하는데 6개월이나 걸린다는 것도, 이견 조율 때문에 사업이 완전히 중단된다는 것도 상식선에서 납득이 안가지만 납품이 안된 실제 이유는 따로 있기 때문이다. H사는 사업기간 전체를 통틀어 계약조건을 충족하는 제품을 확보하지 못해 물리적으로 납품을 할 수가 없었던 것이 공사의 답변에서 밝혀졌다.
공사는 H사 또는 협력사의 슬라이딩 비상문에 관한 특허 보유 여부를 묻는 질문에 출원중이라고 답변했다.
4 제품 하자 책임을 왜 공사가 지나
이견이 발생해서 조율에 시간이 걸렸다는 점을 십분 인정해도 더욱 납득이 안되는 게 있다.
제품의 하자 책임은 제품을 만들었거나 납품한 업체의 몫이어야 한다. 그런데 공사는 공사의 책임이라며 스스로 올가미에 자기 목을 밀어넣고 있다.
공사는 광고업체 Y사의 품질보증 및 하자보수 요구사항을 계약업체 H사가 제출한 하자관리계획으로는 충족하지 못하여 이견을 조율하느라 납품이 지연됐다고 밝혔다.
제품의 하자 문제는 계약서에 명시된 내용이다. 물품규격서 14항 ‘하자보증 및 하자보수’와 15항 ‘성능보장’ 부분이다. 계약업체의 하자관리 계획이 충족을 못했다면 이 부분이 계획에 제대로 반영되지 못했다는 의미다.
이견 조율의 결론도 이렇게 났다. 공사는 ‘광고업체의 요구를 수용해서 사업계약문서(물품규격서)에서 정한대로 품질보증 및 하자보수를 수행키로 협의하여 사업을 재개했다’고 밝혔다.
그런데 공사는 계약을 불이행한 계약업체에 어떤 조치를 취했는지 묻는 질문에 “발주기관(우리 공사)의 책임으로 사업의 지연이 발생하였기에 계약업체(시공사)에 별도로 불이익은 부과하지 않았다”고 밝혔다. “광고업체의 하자관리 요구사항이 적정하다고 판단되는데도 이를 수용하지 않은 우리 공사의 귀책이며 계약업체에는 지연배상금을 부과할 수 없는 것”이라고도 했다.
저간에 어떤 일이 있었기에 절대적인 갑 위치인 공사가 이런 자승자박의 모습을 보이는지 미스터리가 아닐 수 없다.
5 안전성 테스트, 안하나 못하나
입찰 조건에는 50만회의 안전성 테스트에 합격한 비상문 제품을 설치하도록 되어 있다. 설치하고 나서 테스트를 받는 것이 아니라 합격한 제품을 설치하라는 것이다. 안전성 테스트 합격이 사업 진행의 첫 출발점이라 할 수 있다. 안전성 테스트를 통과한 합격품이 아니면 미리 제작 설치하기도 어렵다. 설치후 테스트를 통과하지 못하면 다 철거해야 하기 때문이다.
공사는 H사가 설치할 제품이 현재 안전성 테스트를 ‘준비중’이라면서 5월중 완료될 ‘예정’이라고 밝혔다. 납품 기한을 넘기고도 3개월이나 지난 3월 말 현재 아직 테스트가 시작도 안됐다는 얘기다. 그렇다면 H사가 올해 1월 이대입구역에 설치했다는 시제품 비상문도 안전성 테스트를 거치지 않은 것이어서 입찰 및 계약 조건 위배다.
테스트는 슬라이딩 비상문을 정상 속도로 열었다 닫았다를 50만 회 이상 반복하면서 안전성에 이상이 없는가를 확인하는 절차다.
6 납품못한 업체에 왜 물량 추가 혜택을 주었나
3월 말 현재 제품 테스트를 준비중이라는 공사의 답변은 계약업체 H사의 납품 기한인 지난해 말에는 설치할 비상문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기한내 납품 불발이 H사의 귀책 때문이라는 것을 명확히 확인해주는 것이다.
그런데 공사는 계약 불이행에 대한 책임을 일체 묻지 않았다. 거꾸로 설치할 물량을 늘려주는 혜택을 주었다. 당초 계약 물량인 17개 역사 1,370개에 4개 역사 327개의 추가 설치 물량을 더해 1,697개로 늘려 준 것. 금액으로는 21억5,400만원이 증가했다. 이 물량은 17개 역사 입찰 때 예고가 돼 있기는 했지만 본래의 사업에 전혀 진전이 이뤄지고 있지 않은 상태에서 추가 물량부터 늘려준 것이어서 그 배경에 의문이 일지 않을 수 없다.
7 재질 변경과 금액 인상 미스터리
이대역 시범설치때 N사는 광고판 좌우측 공간을 알루미늄으로 처리하려 했다. 그런데 공사가 답답해 보인다는 이유로 강화유리로 바꾸라고 해서 바꿨다.
알루미늄은 광고판 뒷부분을 포함한 전체 공간을 한꺼번에 커버하는 단순 공사다. 반면 강화유리는 두 공간에 별도 프레임을 설치하고 유리를 끼워 넣어야 하는 등 시공이 복잡하고 작업시간도 많이 걸려 비용이 늘 수밖에 없다.
공사는 이번 본공사 입찰시 물품규격서에 재질을 강화유리로 사용하도록 못박았다. 그런데 낙찰 이후 강화유리 대신 알루미늄으로 바꾸도록 허용해줬다. 재질을 바꾸는 것만 허용해준 것이 아니라 금액도 2억300만원이나 인상해줬다. 이 재질 변경을 납품 기한 연장의 근거로도 삼았다.
슬라이딩 비상문의 열림폭을 넓게 하려면 제품의 상부 레일부분이 비상문의 무게를 충분히 견디도록 설계돼야 한다. 강화유리 무게를 충분히 견디지 못할 경우 다른 가벼운 재질로 바꿔야 한다. N사가 갖고 있는 슬라이딩 비상문 특허의 핵심 두 가지가 바로 이 부분과 앞서 살펴본 가로형 패닉바다.
공사의 재질 변경 허용으로 21개 역사의 비상문 좌우측 공간은 시야가 가려지는 알루미늄으로 시공될 예정이다.
N사는 전체 물량의 재질이 변경됐으면 금액은 꽤 인하돼야 하는데 거꾸로 인상이 돼 이해가 안간다고 밝혔다.
8 이대입구역 시범 설치는 왜 했나
공사는 본공사 입찰을 전제로 2022년 5월 이대입구역에 예산 2,000만원을 들여 슬라이딩식 비상문을 시범설치했다. 공사, 계약업체, 광고업체 3자간 협의를 통해 안전성과 문제점 등을 파악해 개선 보완책을 마련, 본공사에 적용할 정확한 사양을 도출하기 위한 목적에서였다. 이 목적대로 3자간 협의 과정을 거쳐 시범설치가 완료됐고 공사는 검수 후 공사대금을 완불했다. 그렇다면 본공사도 시범설치한 내용대로 입찰과 설치가 진행돼야 하는게 상식이다. 그렇게 되면 광고업체와 계약업체간에 이견이 생길 리 없고 설령 생기더라도 작은 문제에 국한될 가능성이 크다.
그런데 공사가 시범설치한 사양대로 본공사 사업을 진행하지 않으면서 일이 꼬였다. 공사가 납품 기한 연기의 이유로 드는 광고업체 Y사와 계약업체 H사간 시설물 하자 보증을 둘러싼 이견이 여기에서 생겼다.
시범설치한 사양을 본공사에 적용하지 않을 거라면 굳이 예산을 써가며 시범설치를 뭐하러 했는가 하는 의문이 생긴다.
9 계약 사항의 중대 변경인데 왜 계약변경 아닌 설계변경인가
이 사업 비상문 설치는 입찰 및 계약 조건과 엄청나게 다른 내용으로 진행되고 있다. 사업기간 12개월이 18개월로 무려 절반이나 늘어났고, 사업 물량과 금액도 17개 역사 85억여원에서 21개 역사 103억여원으로 거의 4분의 1이나 증가했다. 이 예산은 전액 서울시가 지원하는 시민의 혈세다. 중요 자재의 재질도 바뀌었다.
그렇다면 계약 변경 절차를 거쳐 업무가 진행돼야 하는게 상식이다. 공사 설치 담당 부서와 발주 담당 부서간에 예산이 부족해 17개 역만 발주하고 예산이 확보되면 4개 역을 계약변경을 통해 진행하기로 발주때 협의한 바도 있다.
그런데 공사는 계약 변경으로 진행하지 않고 설계 변경으로 진행하고 있다. 설계를 변경한 날짜는 계약서의 납품 기한일이 도래하기 하루 전인 2023년 12월 28일이다. 공사는 이에 대해 “납품기일이 도래함에 따라 설계변경 요청이 있어 설계변경을 시행한 것”이라고 밝혔다.
10 특허 제공하겠다는데 왜 협의조차 안하나
N사는 낙찰 직후 H사가 자사의 제품을 채택하지 않자 향후 이 사업이 정상적으로 진행되기 어려울 것으로 예상했다. 슬라이딩 방식은 N사만이 특허제품을 갖고 있고 다른 업체가 이 특허를 피해 슬라이딩 방식의 다른 제품을 새로 개발해서 기한 안에 납품하기가 쉽지 않을 것으로 봤기 때문이다.
예상했던대로 납품기한을 넘기고도 수 개월이 지나도록 비상문 설치에 진척이 없자 N사는 공사에 자사의 특허 제공 의사를 밝히고 검토와 답변을 요청했다. 그러나 공사는 아예 답변을 하지 않았다.
다만 공사는 SP투데이의 취재 질문에 시제품 설치 등이 진행되고 있는 상황에서 계약상대자에게 특정 업체의 기술 사용을 요구할 수 없어 답변하지 않은 것이라고 밝혔다. 계약상대자가 납품 기한을 이미 어겼고, 이후 수 개월이 지나도록 제품의 안전성 테스트를 시작조차 못하고 있는 상황에서 검증된 양질의 제품 특허를 제공하겠다는 제안을 협의조차 안해보고 묵살한 것이다.
공사가 H사가 설치할 예정인 비상문의 제작 공장 검사를 완료했다고 밝힌 날짜는 지난해 12월 14일이다. 납품 기한 2주를 앞두고 공장을 방문했다는 것 자체도 납득이 안가지만 더 큰 의문은 도대체 공장 검사때 뭘 보고 점검했는지 하는 의문이다.
공장 검사를 완료하고 3개월이 넘도록 제품의 안전성 테스트가 시작도 안되고 있기 때문이다. 50만회 테스트에만도 오랜 기간이 소요된다. 설치가 지연되는 기간 동안 비상시 시민의 안전에는 구멍이 날 수밖에 없다.